지리멸렬 /허연
늦겨울 짚 더미에 불이 붙는다.
알맹이 다 털어내고 껍데기만 남은 것들은
타닥타닥 뼈 소리를 내며 재가 되고.
겨울은 그렇게 물끄러미 먼지가 된다.
그을린 소주병 몇 개와 육포 몇 조각이
누군가가 방금 전 시키지도 않은
자기 변론을 했음을 알려준다. 짚불 앞에서
느끼는 거지만 인생에는 지리멸렬한 요소가 있다. 깔끔하게 털지 못하는 그 무엇, 질척거리는 헛소리 같은 게 있다.
가늘고 긴 인생들에게 불꽃 몇 개가 날아든다.
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헛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 2012년 문학과 지성사
삼 일째 폭설이다. 온통 헝클어진 삶을 새 판으로 다시 짜보라고 말하는 듯 연신 눈 내린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까? 언제나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만 되풀이되는 지리멸렬 위에 눈 내린다. 세상이 온통 흰 백지의 시간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비닐봉지를 들고 기우뚱 기우뚱 걷는 저녁, 자꾸 열린 가슴 위로 눈송이들이 들이친다. 입안에서 터지고 마는 말짱 도루묵의 알처럼 타닥타닥 헛소리가 내린다. 둘러보니 온통 지리멸렬이다. /박홍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