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국 끓이는 저녁 /최기순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는 가로등
둥그런 불빛 속으로 눈이 쌓인다
흩날리는 눈발 속은 아득해서
눈보라 벌판에 까만 점같이
죽은 할머니가 동태 몇 마리 사들고 걸어온다
눈은 펄펄 날리고
동태국은 국솥에서 하염없이 끓고
다시 어린 내가 부엌문에 꼭 붙어 서서
아랫마을 장기 두러 간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온 집안 동태국 끓는 냄새 구수하고
며칠 전 사십구재를 지낸 숙부도 돌아와 장작을 팬다
쭉쭉 찢어놓는 나무의 속살은 푹 익은 살코기 같아
어머니도 생전에 쓰던 자루가 긴 국자를 들었다가 놓는다
출처- 시집 『음표들의 집』 / 2012년 푸른사상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지상의 동태국에서는 김이 오르고 그 사이에 화자(사람)가 있다. 삼중물의 어우러짐이 안전한 구도를 보여준다. 마들렌 과자처럼 동태국 끓이는 저녁이, 칼칼하고 얼큰한 국 냄새가 오래전의 시간과 공간속으로 손을 잡아끈다. 아니 오래전의 시간과 공간이 지금 이 순간 막 도착한 것이다. 그 시공간 속으로 죽은 할머니와 죽은 할아버지와 죽은 숙부와 어머니까지 불러내는 군고구마처럼 달큰하고 따뜻한 저녁이다. 모든 생명들을 살게 하고 연결시키고 집합시키는 음식의 힘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