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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나의전쟁 ① 하 병 열 옹
열여덟에 하사관으로 국군 입대
1년뒤 전쟁 터져 젊음 송두리째…
젊은이들 이런 이야기 관심 가질까?

 

명령 따라 북진 또 북진

38선 가장 먼저 넘은 3사단 23연대

영하 40도 혹한서 인민군 쫓아 진격

패잔병 1개 사단 맞닥뜨려 구사일생



한국사 3대 패전 ‘현리전투’

갑작스런 포위공격에 전멸 직전

뛰고 또 뛰다 기진맥진 생사기로

정신 잃었는지 어떤지 기억 없어



포로획득작전·마지막 전투

노리고지 침투 중공군 포로 생포

진격·후퇴 반복하며 고지 재탈환

허리 수류탄 파편 박혀 병원 후송



나라 위한 ‘열망’

퇴원후 1960년 대위로 현역 예편

사회적 기여 원했지만 번번히 좌절

전우 권익 위해 뛰다 가세 기울기도



1999년 참전유공자 군포지회 설립

DMZ에 시신 수습도 못한 동료들

추모비 세워 넋 위로하고 싶어


 

 

 

전쟁은 상처다.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그렇다. 어떤 명분도 전쟁으로 인해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 없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포화가 날아다니던 3년 동안 특히, 젊은 생명은 스러져갔다. 훈장이 목숨을 대신할 수 없듯,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저당잡힌 1950년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보고서다. 옛 이야기가 미래의 교훈일 수밖에 없는 당위를 찾고자 하는 젊은 신문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10회에 걸쳐 싣는다.

1949년 6월, 당시 18세였던 하병열(82)옹은 하사관으로 국군에 입대했다. 6·25가 발발하기 1년 전이었다.

그가 배속된 3사단 23연대는 38선을 가장 먼저 넘은 부대이기도 하다. 휴전을 앞두고 벌어진 노리고지 전투서 부상으로 후송 될 때까지 전장(戰場)인 한반도 전역을 누볐다.

◇ 전쟁 발발과 북진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은 그의 인생을 휘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부대(3사단 23연대 3대대)는 38선을 넘고 있었다. 그의 주된 기억이 시작되는 1950년 10월 1일의 일이다.

“원산을 점령하고 덕원, 함흥, 지금 원자탄 실험한다는 길주도 지나서 함경북도 무산군 상황토에 올랐지. 명령에 따라 북진북진 하다보니 어느새 11월이었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 있었어.”

패주하는 인민군을 쫓아 정신없이 진격한 부대는 영문도 모른채 철수했다. 그 해 12월 1일과 1월 4일. 두 차례의 후퇴를 반복하며 점차 지쳐가던 부대는 영월군 옥동의 야산에서 인민군 패잔병 1개 사단과 맞닥뜨린다. 그가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첫 전투였다.

“당시 12중대(중화기 부대)에 분대장으로 있었는데 우리 중대와 10중대가 1개 사단하고 마주한거야. 패잔병이라도 전력차가 크니 일단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그때 무전이란게 많이 열악했지.”

증언은 계속된다.

날이 밝으니 인민군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적(敵)도 간밤에 정찰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화기를 총동원해 반격해 봤지만 전투가 될리 없었다. 부대는 급히 퇴각했다.

“밀려오는 적 앞에서 무력했지. 화기를 눈속에 파묻는게 고작이었어. 생사가 단지 운에 달려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산 중턱까지 내려와 지원부대와 합류한 뒤 다시 격전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인민군이 퇴각한 후였다.

인민군은 사상자는 물론 부상자의 양말까지 벗겨갔지만 부상병을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량(少量)의 식량과 함께 살려두고 갔다고 기억하는 그는 그것이 부상자 수습으로 추적을 지연시킬 의도였는지 같은 동포에 대한 관용이었는지 아직도 알 길이 없다.

 

 

 



◇ 4월 중공군 1차 공세와 노리고지 투입

1951년 4월.

동부전선인 인제 현리에 주둔해 부대를 정비하던 3대대는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맞게 된다. 현재까지도 ‘한국사 3대 패전’으로 불릴 만큼 처참한 피해를 안겨준 ‘현리전투’가 그것이다.

“갑작스런 포위공격에 꼼짝할 수가 없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속한 3사단과 7·9사단이 전멸 직전까지 몰려있었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뛰고 또 뛰어 정선 부근에 다다르니 탈진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는데 나도 기진맥진해서, 정신을 잃었었는지 어떤지 기억이 없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은 부대는 생존자를 수습해 양양 남대천에서 한달 간 심신치료와 신병보충을 받은 후 한동안 고성군 간성고지와 가칠봉의 경계작전에 투입됐다.

1952년 2월 군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하 옹은 갑종장교 후보생 25기에 지원했다. 6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한 하병열옹은 9월 1일, 연천에 주둔중인 1사단의 11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발령받고 당시 ‘피의 능선’으로 불린 노리고지에 투입된다.



◇ 포로획득작전과 마지막 전투

1953년 4월 하 옹은 노리고지에서 적군 정보파악을 위한 ‘포로획득 작전’을 맡게 된다.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사이의 개활지는 노리고지 뒷면을 타격, 중공군을 압박하기 위한 미군 전차부대의 주요 이동로였다. 때문에 중공군은 매일 밤, 대전차호를 파기위한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사안이 중하다 보니 상부에서 휴가와 훈장을 조건으로 걸었지. 지원자를 받았는데, 나를 포함해 9명이 3인 1조로 3개조를 꾸렸어. 각각 TNT 20파운드짜리 2개와 수류탄 2발 그리고 중대에서 모은 M2칼빈 소총을 하나씩 받았고, 당시는 비밀 장비였던 방탄복도 지급받았지.”

야간 침투한 부대는 수류탄과 TNT를 일제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폭염을 뚫고 들어가 생포한 적은 부상이 심해 심문 전에 죽고 말았다.

“2차 작전을 전개했는데, 같은 방식을 사용한 게 실수였지. 매복하던 중공군의 기습에 분대장 하중사가 죽고 말았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는 벌거벗은 몸뚱이만 남아있었어. 치솟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았지.”

결국 작전은 초병 생포로 변경됐다. 하 옹은 지원자 중 발이 빠른 김하사와 김상병 2인을 1개조로 편성하고 적의 방심을 노려 주간에 침투하는 대담한 작전을 전개했다. 벌거숭이가 된 고지로 적이 접근할 것을 생각치 못한 탓인지 경계가 허술했다. 침투조는 졸고 있는 적을 생포해 돌아왔다.

이 작전을 계기로 1사단은 고지 탈환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24일과 25일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다.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는 접전 속에서 이문세 상사와 12명의 부대원을 잃은 그는 25일 12시 전우들이 산화한 고지를 재탈환 하고서야 허리에 박힌 수류탄 파편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후송돼 전쟁을 마쳤다.



◇ 예편, 그 후의 삶

퇴원 후 원대 복귀한 하 옹은 1960년 7월 대위로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전쟁이 끝난지 수년,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열망이 있었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국회의원도 돼볼까 했지만, 곧 포기했지.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이미 정치권엔 없었어.”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현장을 지킨 사람들의 몫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에 부산의 부랑아 복지사업에도 참여했으며, 서독파견 광부 모집에도 지원하는 등 사회적 기여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번번히 좌절을 맛봤다.

“선도사업도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이 개입하면서 정치적인 성격이 짙어져 발을 뺐지. 광부에 지원해서는 결국 폐가 안좋다는 이유로 탈락했지만 뒷돈이 오가는 꼴을 보니 아니다 싶었어. 300명 모집에 180명인가 밖엔 못 갔지”

이후 결혼한 그는 아내 친구의 도움으로 가내공업으로 나전칠기 제조업을 시작했으며 6·25 참전자들의 권익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했다.

당시 무공수훈자의 국립묘지안장 요건이 ‘태극·을지 훈장 수여자’로 한정된 것에 반발해 무공수훈자 권위 신장과 연합회 창립에 몰두했다.

“총 한번 안 쏴보고 공무원으로 20년 근속만 해도 가는 국립묘지에 참전유공자들이 못간다는게 너무 분해 4~5년을 쫓아다녔지, 때문에 가세가 기울었지만 후회는 없어.”

이후 1999년에는 6·25참전유공자회 군포시지회를 설립해 현재까지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최근에는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와 함께 추진해온 연천의 태풍전망대 노리고지 전적비(추모비) 건립사업이 결실을 맺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문세 상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그와 함께 한 12명의 우리 소대원들. 지금은 DMZ에 있어 시신 수습도 못하고 있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를 세워 조금이라도 넋을 위로하고 싶어.”

그러나 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드는가 보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줄까? 국가관이라는 것도 우리와는 많이 다른 거 같아. 우리는 나라가 있어야 우리도 있다는 생각이 강했거든, 그 만큼 위험한 시대였지. 그런데 요즘은 내 손자들도 이런 이야기에 통 관심을 안보여서 아쉬워…. 요즘 또 북한에서 원자탄 실험한다고 난리인데 이런 때일수록 국민들이 국가관 바로 세우고 단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회한이 지나간 때문인가.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 고맙다며 두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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