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 서있는 나무 /김후란
밤새 눈이 내린 그 이튿날
눈밭에 발을 담근 겨울나무들
여럿이서 혼자서
세상을 응시하는 철학자 되어
장엄한 침묵 속에 서있다
모차르트의 ‘구도자의 저녁기도’가
흐르고
추운 겨울나무에겐
길게 흘러내린 그림자뿐
말없이 내게 기댄 그림자처럼
시와시 /2012/ 가을호/ 푸른사상사
적막한 풍경을 앞에 두고 서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고요히 창 앞에 서서 눈밭에 발을 담그고 서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이의 내면 풍경은 어떤 것일까. 봄날의 눈부신 새싹들, 여름날의 출렁임, 가을의 만추가 다 지난 다음 고요한 흰 빛 위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서있는 나무들은 침묵하는 철학자의 모습이겠다. 그것을 발견한 시인의 눈도 이미 세상의 연연하던 것들로부터 마음을 놓아 보내고 ‘구도자의 저녁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기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