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
나는 골목길을 택했다.
골목에는 녹슨 양철 처마와 불빛 꺼진
꾸부러진 창과, 팔짱 낀 발자국 소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신의가 있다.
골목 끝에 간신히 그곳만이 환한 가게가 있다.
잠드는 일을 태만이라 믿는 반질반질한
사과 알들이 베개 맡 책갈피처럼
잠들지 않고 있는 심야의 가게.
지워진 어릴 적 기억 속 풍경의 한 단면이
망각의 깊이 밑바닥에서 정다운
오렌지 빛 삼투압을 띄고 조용히 수면 위에
떠오르는 별빛 얼어붙는 겨울 하늘 골목 끝.
-- 허만하,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문예중앙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