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바쁜 직장인들은 벌써 걱정이 태산들이다. 마무리해야 할 일은 많은데, 가야 할 데도 많고 돈 쓸 데도 많아 남은 12월이 무겁다는 것이다.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렇게 바쁜가’ 푸념을 하면서도 며칠 남지 않은 2013년 달력에 모임, 술자리 등을 빼곡히 적는 모습들을 보며 문득, 우리의 소중한 가족들은 그 빠듯한 시간 어디쯤 자리하고 있나 생각해 본다.
올해 MBC에서 기획하여 신선한 재미를 준 ‘일밤-아빠 어디가’에서는 지난 8일 아빠와 아이들이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 경험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중 한 가족이 뉴질랜드 가족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한국의 아이들은 할 일이 너무 많아 밤 10시나 11시에 잔다고 하자 뉴질랜드 부모와 아이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그려졌다.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들이 저녁 7시면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그 방송을 보며 나는 두 나라 어린이들의 전혀 다른 일상생활도 그렇거니와 더 새삼스러운 건 뉴질랜드 부모들이 저녁 7시에 아이들과 집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풀타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 7시 전에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들의 삶이 일 중심적으로 돼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성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일과 후 의무화된 회식 자리까지 참석하고 밤늦게야 겨우 집에 들어가고, 아이들도 학교 수업 후 학원을 전전하며, 집에서도 공부·숙제를 하느라 역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부족하다. 여성들도, 취업을 하든, 전업주부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OECD 가족 통계(2012)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중에서 가사, 자녀 돌봄 등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비중은 4.3%로 23개 비교 대상국 중에서 가장 낮다. 비교국 중에 가족시간 비중이 가장 큰 나라는 호주(12.9%), 뉴질랜드(12.4%), 스페인(12.2%), 스웨덴(11.8%) 등이다. 한국 다음으로 낮은 나라는 터키(6.1%)와 일본(6.2%)인데, 이 나라들도 한국과의 격차가 적지 않았다.
한국은 가족시간은 최하위권이지만 노동시간 비중은 OECD 비교국가 중 상위권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노동에 보내는 시간은 멕시코 30.0%, 일본 27.4%, 한국 26.5%로 한국의 경우 하루의 4분의 1 이상을 노동하며 지낸다. 노동시간 비중이 적은 나라들은 벨기에(15.6%), 독일(17.4%), 프랑스(18.7%), 뉴질랜드(19.9%) 등이다.
아빠가 아기를 15분간 안고 있으면 뇌에서 행복 물질이 배출되는 반면에 이성과 바람을 피우고 싶은 욕구와 관계된 물질의 배출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자녀를 안아주고 함께 놀아주는 시간은 자녀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부모들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며, 좋은 가족시간은 가족복지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너무도 일 중심이 된 나머지 가족과의 시간은 마치 또 하나의 일이나 의무처럼 ‘피곤’한 일이 되어버리면서 결국 가족 자체의 중요성마저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일-가정 균형과 건강한 가정 만들기를 국가정책으로 하고 있는 시대이다. 일-가정 균형과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시간 근로 관행과 퇴근 후 회식 문화 개선, 정시 퇴근 문화 정착 등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생활이 일 끝나고 겨우 들여다보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 일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책임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영역이라는 인식의 확대가 필요하며, 개인들 스스로도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발적 선택이자 당연한 문화가 되는 연말, 그런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