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金處善)’만큼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실명으로 비중 있게 등장하는 내시는 없다. 세종 때 입궐해 일곱 명의 왕을 모셨던 그는 연산군의 손에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지만 역사는 그를 직분에 충실한 내시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연산군의 공포정치가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입도 열지 못할 때 ‘바른 정치’ ‘백성들을 살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동시대 내시 ‘김자원(金子猿)’은 왕명출납을 가장 악용한 대표적 인물로서 악행의 전형이다. 그가 승정원에 출입할 땐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는 또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관료들이 왕을 볼 수 없게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가 행차하는 곳에는 아무리 양반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했다. 김자원이 이렇게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당시의 절대권력자 연산군의 후광 덕이다. 연산군은 수족처럼 따르는 김자원을 앞세워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었고, 김자원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내시는 왕과 가까이 있으면서 궁중 내의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신분에 있었다. 때문에 제3의 권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내시는 양반관료들과 원천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은 이런 내시들을 여러 가지로 이용해 양반들의 치부를 들춰내가니 악역을 담당케 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대신들과는 달리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정치 이외의 군주의 삶을 지켜본 이들도 내시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하였다. 왕과 신료들의 관계를 최대한 악용해 때로는 국정의 기본질서를 깨뜨리기도 했지만 왕과 정치라는 공공적인 영역을 나누는 신하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내시의 등장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천년이 훨씬 넘는 셈이다. 내시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내시부를 폐지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런 내시가 부활하기라도 한 것인가. 정치권에 때 아닌 ‘내시’(內侍) 논쟁이 불고 있다. 새해의 희망을 얘기하기도 부족한 시기에 치졸한 말싸움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