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박철
아침이면 창문 밖 바라보이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깃발이 나부낀다
여인들이 이불을 턴다
참 극성스럽게도 턴다 격렬하게 흔든다
어떨 땐 옘병, 어쩌구 하며
백기를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아자! 어쩌구 하면서 홍기를 흔든다
그렇게 지난 밤을 털어내고 참 매몰차게도
문을 닫고 돌아선다
-박철 시집 ‘작은 산’ / 실천문학사
이불을 터는 일은 습관이다. 살비듬, 머리카락, 땀 등등 열심히 살아낸 어제를 정리하는 의식이다. 이불을 털지 않는 사람도 아침을 맞는 나름의 경건함이 있을 것이다. 이불을 터는 기분은 날마다 다르다. 삶이 늘 즐겁지 않듯이, 늘 우울한 것도 아니듯이, 오늘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깃발이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다가도, 하늘이라도 당겨오듯 큰 들숨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는 것이다. 매몰차게도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인 것이다. 당신의 베란다에 나부끼는 깃발의 기분이 궁금하다./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