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년 9월
그렇게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한없이 메마른 가지는 물기라고는 흔적조차 없이 겨울을 지키며 숨죽여 있다가 언 눈물 녹여 마신 물기를 밖으로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제 몸을 감추고 있던 목련이 드디어 입을 여는 구나 알아보자. 성급하게 커다란 이파리를 바람에 툭툭 제 무릎 아래로 내려놓고 있다. 연분홍 진달래 점점이 박히고 개나리 종알종알 지저귀는 봄, 그래 봄은 왔다. 팍팍하고 물기 없어 메마른 삶, 무거운 어깨 떨치고 가라고 환한 빛을 켜 칙칙한 발 앞을 비춰주는 봄이다. 연초록 싱그러운 물기 촉촉하게 젖어들어 평안한 봄을 누릴 수 있도록.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노인들이 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되는, 식솔을 챙기는 장년들의 마음이 환하고 환해지도록./이명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