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지다
/박은율
링거병 매달고 집에 온 지 하루
너는 다시 실려 나가고
수국꽃 이울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증식되는 불안
시간이 느리게 발효되는 항아리들
묵직하게 늘어선 장독대
쐐기풀 무성한 마당, 온종일 네 그림자 어른거린다
이따금 다급히 울다 제풀에 잦아드는 전화벨 소리
낡은 처마 밑 왕거미줄에 맹렬히
파들거리던 한 마리 나비
마침내 고요해진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여닫히는 대문
썰물 지듯 빠져나가는 저녁놀
-박은율 시집 『절반의 침묵』/민음사
이른 아침 부산한 어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잠에서 깼을 때 할아버지는 병원차에 실려 갔다. 막연하게 불안은 증식하고 하루 종일 할아버지의 그림자는 눈앞을 왔다갔다 어른거렸다. 간간이 시내에 다녀온 동네 어른들이 할아버지 소식을 물어오고 전화벨이 울려 누군가 검은 수화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이후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집에 혼자 남아 할아버지 소식보다는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잦아들던 전화벨 소리가 할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영영 집안에 발 들이지 않았다. 새총을 만들어주고 바람개비 만들어 입김으로 돌려주던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고요했다. /성향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