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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 10월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징 선생(1886.2.20~ 1944.2.22)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0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단 한치의 땅이라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라고 외치며 전사한 백마고지 3용사인 강승우 중위와 안영권· 오규봉 하사를 선정, 발표했다.

/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일제 탄압 속 우리말사전 편찬 한평생

“조선 말과 글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

표준어 제정·사전 편찬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헌신

조선어대사전 편찬 등 활약



일제 조선어말살정책 일환

조선어학회 인사들 체포

갖은 고문으로 옥중 순국



한징(1886. 2. 20 ~ 1944. 2. 22) 선생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한징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1927년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사전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가입,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했다.

선생은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했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표준어 사정 독회에 모두 참여하는 등 제1독회와 제2독회에서는 수정위원에 선정돼 활약하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1936년 4월부터 1942년 9월까지 ‘조선어대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했다.

조선어학회의 월급이 박봉이어서 저녁에는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선생은 언제나 쉴 새 없이 사전 원고를 쓴 것으로 유명했다.
 

 

 


선생은 조선말 큰 사전을 빨리 세상에 내놓아 우리말이 보존되어 우리민족이 영구히 유지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학회 인사들을 체포해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가 1944년 일제의 갖은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평생 우리말과 글을 지키다 순국하신 선생의 뜻을 기려 10월 31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10월 한 달 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강승우 중위, 안영권·오규봉 하사

“한치의 땅이라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백마고지 3용사 폭탄 들고 적진으로

중부전선 최대격전지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 공격 아군 피해 극심



TNT·박격포탄 등 지니고

3용사 적진으로 육탄돌진

기관총 특화점 격파 후 산화

10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강승우 소위,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 등 3용사는 당시 중부전선 최대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내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예하 제1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돌진해 적의 기관총 특화점을 격파 한 후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웅이다.

백마고지 육탄 3용사 중 강승우 소위는 1930년 남제주군 성산읍 출생으로 일본 오사카 흥국 산업학교를 졸업한 후 1951년 8월 갑종7기로 소위로 임관했다.

안영권 일병은 1925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출생으로 1952년 2월 27일에 입대, 오규봉 일병은 1928년 충남 천안군 성환읍 출생으로 성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4월 11일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총병으로 참전했다.

‘한 치의 땅도 거저 얻은 땅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쟁의 막바지인 당시 정전협정을 앞두고 1952년 10월 철원평야 일대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 백마고지(395m)는 국군의 전설이 피로 새겨진 현장으로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아군과 중공군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마고지는 철원평야와 고대산 및 아군의 주보급로를 위협하는 중요지역으로서, 제9사단은 장마철이 지나고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자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진지를 보강하던 중 적의 집중적인 기습공격으로 395고지를 빼앗겼다.

이에 제9사단 제30연대는 즉각 역습을 실시했으나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공군의 수류탄 및 기관총사격으로 아군의 피해가 극심해 돌파구 마련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역습부대인 제30연대 제1중대의 공격이 실패한 상황에서 제1중대 제1소대장인 강승우 소위는 목표 60m 측방의 기관총사격으로 피해가 극심해지자 대공포판을 등에 멘 채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자동화기 진지로 돌진하는 오규봉 일등병을 엄호하기 위해 안영권 일등병과 화력으로 엄호했다.

또한 소대장 자신이 직접 TNT와 박격포탄으로 적 특화점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후 기관총진지 7m 전방까지 포복으로 전진해 폭발물을 투척하는 순간 우측 팔에 총상을 입고 떨어뜨린 폭발물을 안영권 일등병이 신속히 주워 투척했다.

마찬가지로 적 진지에 근접한 오규봉 일등병도 수류탄을 투척해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함으로써 중대가 공격을 재개해 목표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했다.

정부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1953년 7월 1일 을지무공훈장 수여와 함께 강승우 소위는 중위로, 오규봉· 안영권 일병은 하사로 추서했다.



/정리=이상훈기자 l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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