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
/권순자
구겨진 허물이 누웠네
빈 술잔이 쓰러져
바람과 낯선 길에서 배회하네
아픔은 선명한 흉터자국을 돌에 새겨놓았네
한때 추억에 젖은 발들이 다녀가기도 했네
몇 겹의 시간을 눈감고
세상의 구멍을 지나
드디어 삶의 곰팡이들을 떨치고
한 떨기 목숨이
한 알의 모래알로 누웠네
바람마저 끈적한 입술로
입맞춤하고 가는 저녁
-시집 ‘순례자’(시산맥사, 2014)에서
달게 잠잔 적이 언제였던가. 불안하게 꿈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상 속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잠에서 눈 뜬 어느 날 흉한 몰골로 변한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낭자하게 흐트러진 자리에 ‘구겨진 허물’로 누워있는 현실은 섬뜩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끔찍하도록 선명함 앞에서 어떻게 시인은 ‘드디어’ 삶의 굴레를 벗었을까요? 우리 목숨이 바닷가 모래 알 같다는 깨달음이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전전반측 잠들지 못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면 못내 허허롭기만 합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길 사후에 우리 저 우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우리 사라지지 않고 본래 그 자리로 가 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달게 잠 한 번 잤으면 좋겠습니다. /이민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