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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선열들의 조선독립 외침을 듣다

역사탐방 수원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 발자취를 따라서

 

수원서 계몽운동 벌이다 일제에 강점된 후 만주로 망명
임 선생, 신흥강습소 운영비 조달 … 한때 교장 맡기도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임면수 선생 새겨넣는 시간 가져
고구려의 역사 확인… 북한 바라보며 분단 현실 재확인


수원을 대표하는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필동(必東) 임면수(林冕洙) 선생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구성된 역사탐방단 26명은 지난 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 대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역사탐방은 임면수 선생이 수원 지역의 계몽운동에 헌신해 오다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후인 1912년 만주로 망명한 뒤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엿보기 위해 마련됐다. 탐방에 나선 학생들은 앞서 알고 있던 선조들의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새로이 임 선생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1천500년전 만주 일대를 호령한 고구려의 역사를 확인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북한을 바라보면서 분단의 아픔을 재 확인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역사 탐방 첫날인 8월 1일, 필동 임면수 선생 역사탐방단은 예정된 집합시간을 한시간 앞둔 오전 9시부터 인천 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내 이번 역사탐방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짐작케 했다.

간단한 출국 절차를 마치고, 오후 1시 대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탐방단은 바뀐 시각으로 오후 1시 30분 쯤 대련 공항에 발을 디뎠다.

한시간 늦은 현지와의 시간차로 이날 하루는 25시간이 됐다.

시간을 번 듯도 했지만 중간 휴식지인 단둥까지 버스로 4시간을 더 이동해야만 했다.

도착한 단둥(丹東)은 압록강을 따라 자리한 도시로 강 너머로 신의주가 바라다 보였고, 강을 따라 항해하는 북한 선박의 모습도 간혹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이동에 굳은 몸을 펴면서 탐방단 학생들은 압록강 너머 노을이 지고 있는 신의주의 모습을 확인했다.

또 단둥에서 강을 넘어 신의주로 길게 뻗은 신 압록강대교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가이드가 전하는 변화하는 중국과 북한의 외교관계에 대한 설명에 귀기울였다.

강변 한켠에서 진행중인 한복 기념촬영은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했다.

현지식으로 허기를 채운 탐방단이 다시 3시간여를 이동해 통화현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첫 날의 강행군 덕분에 둘째날은 본격적인 역사 탐방이 가능했다.

“1천500년전 고구려 선조들이 말을 타던 곳, 100년 전만해도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수원을 거쳐 만주에 닿을 수 있었던 그 시대 젊은이들이 가졌을 ‘세계로의 확장성’은 휴전선으로 분단된 지금을 사는 여러분들과 큰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이번 탐방이 여러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날 탐방은 한준택 단장이 학생들이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전하는 조언으로 시작됐다.

버스를 달려 도착한 집안은 고구려 두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의 흔적을 확일할 수 있는 곳으로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의 릉이 있다.

첫 방문지로 찾은 광개토대왕릉에 다가서자 익히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위상과 달리 외견상 거대한 돌무더기를 연상시키는 릉의 모습은 초라함을 느끼게 했다.

단명으로 인해 타 왕들과 달리 미리 릉을 만들어 두지 못한 때문으로 추측된다는 현지가이드 김진환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교과서에서만 보던 광개토대왕릉비를 두 눈에 새긴 탐방단은 눈과 귀를 밝히며 광개토대왕릉비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 시도에 대해 전해 들었다.

또 장수왕릉에 가서는 그 웅장한 모습에 들뜨다가도 첩첩이 쌓여있는 돌들의 균형을 잡아주는 12개의 호석 중 하나가 사라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릉 뒷편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숙연해졌다. 도굴돼 크게 훼손된 부속 묘 역시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회영 등이 신흥강습소를 세웠던 유하현 추가가로 향하는 길에서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은 “공간을 잃어버리면 기억에서도 사라진다”면서 “우리의 역사 속 중요했던 공간을 찾아 기억해 주지 않으면 그 공간에서 이뤄졌던 역사와 사람이 잊혀진다. 여러분이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추가가의 신흥강습소 터를 찾고, 여러분 같은 사람이 있는 한 만주에서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후손에게 남겨져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추가가 소고산 자락에 자리한 신흥강습소 터는 이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현지 주민의 도움을 받아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3m 가까이 자란 옥수수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임 선생의 손자로 이번 탐방에 동행한 임병무 시인은 할아버지 필동 임면수 선생이 만주 망명 후 운영비를 조달하고 한 때 교장을 맡기도 했다고 전해지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가 처음 설립된 추가가의 모습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할아버지와 만주로 와 영하의 날씨에 수원에서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서 끝내 숨을 거뒀다는 큰아버지(임우상)의 이야기가 한준택 단장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모습을 임 시인은 조용히 지켜봤다.

탐방단은 경기민예총 이성호 이사장을 따라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추가가를 빠져나왔다.


 


탐방 셋째날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의 여정이었다.

‘백일에 두번 볼 수 있어 백두산 천지라 불린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접하기 힘들다는 천지의 풍광은 이날 수 시간을 들여 천지를 방문한 탐방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반대편으로 보이는 북한의 영토에는 닿지 못하지만 탐방단 학생들은 저마다 사진에 자신과 북녘의 모습을 남겼다.

백두산에 다가가는 동안 탐방단은 맑은 하늘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리고 탁 트인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탐방단은 전환점을 돈 이번 여정을 이어갈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필동 임면수 선생 약력

필동 임면수 선생은 만주로 건너 온 후 임필동(林必東·弼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앞서 수원에서 삼일학교 설립과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 등의 활동을 한 임 선생은 1900년대 초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통해 이회영,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1909년 삼일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계몽운동을 지속한 임 선생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자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1년 이회영 등이 추가가에 한인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임면수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시기는 1912년 2월로, 이후부터 통화현에서 객주업을 하면서 신흥강습소 및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비와 군사훈련비 조달을 위한 활동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흥강습소는 추가가가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의 왕래가 잦아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1913년 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했다.

임 선생은 1915년에는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일각에서는 양성중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별칭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다.

임 선생은 이후 부민단, 결사대 등에서 활동하다 1921년 2월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됐고, 평양감옥에서 온 갖 고문을 받다 전신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러서 고향인 수원으로 돌려보내졌다.

/박국원기자 pkw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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