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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영웅기념비 앞에서 묵념 그날 되새기며 ‘선구자’ 합창

 

역사탐방 수원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 발자취를 따라서

백두산 일정으로 한차례 숨을 고른 필동 임면수 선생 역사탐방단은 민족교육의 산실로 불리는 용정시를 거쳐 연길시와 도문시를 차례로 방문했다.

연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마을마다 세워진 열사비들을 눈에 새기며 일송정을 찾은 탐방단은 용정중학교(옛 대성중학교 터)와 15만원 탈취지, 윤동주 생가, 봉오동전투 전적지 등을 찾았다. 또 연길에서 대련으로 돌아가는 18시간의 기차길과 이번 탐방의 대미를 장식한 여순감옥과 관동법원에서 학생들은 머릿속을 채운 많은 생각을 주고 받으며 이번 역사탐방의 의미를 되새겼다.

우리 민족의 위인을 배출한 용정중학교서 숙연함 느껴

 

열사들이 생을 마감한 여순감옥·관동법원 방문땐 먹먹

 

동료의배신으로 실패한 15만원 탈취사건 일화에 울분

 

윤동주 생가·봉오동전투 전적지 찾아 ‘탐방 의미’ 새겨

어느새 전환점을 돈 4일차, 일송정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탐방단 학생들은 가곡 ‘선구자’ 연습에 열중했다.

이성호 경기민예총 이사장의 선창을 따라 한구절 한구절씩 나눠 불러보면서 차곡차곡 가락을 입에 붙였다. 노래 소리가 끊어질 때면 학생들의 시선은 연변의 산과 지나가는 마을마다 세워진 열사비를 향하고 있었다.

자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길가의 간판 속 한글에 학생들은 친근함을 느꼈다.

무더위를 감내하며 오른 일송정은 해란강을 비롯한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탁트인 경관으로 탐방단을 맞이했다. 한 차례 땀을 식힌 학생들은 정자 앞에 서서 이제는 6번째인지 7번째 인지 모를 소나무를 바라보며 ‘선구자’를 합창했다.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의지를 다졌던 일송정은 1938년 일제가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자 소나무를 말려 죽였지만 1991년 용정시 정부가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세웠다.

새로 심어진 소나무는 이후에도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해 수차례 다시 심기를 반복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이번에야 말로 나무가 백년을 가기를 바랐다.

 



일송정에서 내려다 본 해란강과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온 용문교를 지나 도착한 다음 행선지는 용정중학교였다. 과거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대성중학교 터에 인근의 6개 중학교가 통합돼 세워진 용정중학교에는 1906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던 이상설의 기념관도 위치해 있었다.

이 곳에서 탐방단은 현직 교사의 안내를 받아 용정 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됐던 우리 민족의 교육사와 그 곳에서 배출된 위인들, 그리고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전해들었다.

이어 지명의 유래가 된 용두레 우물과 15만원 탈취거사지, 윤동주 생가 등을 방문했다. 지금의 용정시는 나라를 잃고 방랑한 선조들이 새로 터를 잡은 뒤 그 곳에서 발견된 여진족의 우물에 용두레를 걸어 사용하면서 이름 지은 곳이다. 이 곳에는 철혈광복단의 15만원 탈취의거와 관련한 당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건물도 멀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은행자금 중 15만원을 탈취해 군수품을 구입하려 했으나 결국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간 15만원 탈취사건의 일화는 학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한편, 용정의 조선족 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 김진환 씨의 이야기도 가슴을 무겁게 했다.

부모들이 해외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가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그리워 하며 자라게 되면서 과거 민족교육의 산실이라 불렸던 용정의 ‘교육’이 현재는 ‘고통과 고난의 교육’이 됐다는 이야기가 현지 가이드 김진환 씨의 입을 통해 절절하게 전해졌다.

 



윤동주 생가를 찾은 탐방단은 연변대학의 무명영웅기념비로 향하는 도중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인 ‘서시’를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3·13 반일의사릉을 지나면서는 3·1운동의 불씨를 받아 연변지역에서 벌어진 3·13운동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919년 3월 1일 벌어진 3·1운동의 소식을 열흘 뒤인 11일 전해들은 연변지역의 동포 2만여명은 13일 용정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3·13운동을 전개했다. 3·13 반일의사릉에는 당시 운동에서 순국한 13명의 열사가 모셔져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에서 열린 대규모 독립운동의 이야기는 탐방단에게 또 한번 자긍심을 느끼게 하면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때문에 연변대학 내의 무명영웅기념비에서는 자연스럽게 추모의 분위기가 일어 묵념의 시간이 마련됐다. 기념비에는 조선인들이 만주에 정착하고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에 나서고 또 일제의 무력 앞에 희생된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한 바퀴 비를 돌아 본 탐방단은 이내 이름 없는 열사들을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기차로 18시간을 이동하는 긴 일정이 예정된 5일째, 아침부터 기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분주한 아침이 시작됐다. 연길역에 들어서기에 앞서 도문시로 이동해 두만강을 찾은 탐방단은 첫날 압록강 앞에 섰을 때보다 더 가까운, 불과 수십m 앞에 놓인 북녘을 확인했다.

앞서 두만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김은수 부단장(삼일공고)과 박상풍 부단장(삼일상고)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두만강에서 보트를 타면 돌맹이 등에 가진 돈을 둘둘말아 북쪽으로 던져주곤 했었다”면서 경직된 남북관계에 대한 아쉬움을 주고 받았다. 봉오동전투 전적비에서는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한국에 북한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이기도 했다.

전적비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념촬영을 한 탐방단은 연길역에서 대련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가는 시간 동안 탐방단은 지난 나흘간 보고 들은 것들을 한번 되뇌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이 생을 마감한 여순감옥과 관동법원은 이번 역사탐방의 마지막 코스였다.

여순감옥 곳곳에는 당시 수감자 등의 증언들이 기록돼 있으며, 이 중 많은 공간이 안중근과 신채호 등 대한민국 의사들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학생들은 미로처럼 이어진 관람로를 따라가다 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됐던 감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꼼꼼히 내부를 들여다 봤다. 또 양계초, 장태염 등 당시 중국 인사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높은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 구간에서 한참을 머물며 그 내용에 대한 설명에 귀기울였다.

관동법원 구지로 이동해 만난 조선족 안내인은 유창한 한국어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법정에서의 진술 등에 대해 소개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까지 나라가 힘이 없음을 아쉬워했다”며 “다시는 한국이 힘을 잃지 않도록 학생들이 힘내 달라”는 덕담을 전해왔다.

학생들은 힘 찬 화답으로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 했다.

/박국원기자 pkw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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