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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못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해방되지 못한 역사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1. 다시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건국훈장 받기 위해 건국공로훈장령 공포한 이승만
박정희 군사정권, 건국훈장 공훈 심사위원회 구성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 친일 역사학자 대거 포함
‘건국’·‘호국’ 혼재… 정권 입맛 따라 서훈등급 결정

식민사학자들 주요대학 역사학과·국가기관 장악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주입… 대한민국 역사관 지배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역사관 담은 교과서 없어
이제 새로운 역사 위한 장정에 다시 나설 때


두 사람만 받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29년 만에 ‘임시’자를 뗀 정식 정부가 국내에 수립된 것이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했는지는 정확한 자료조차 없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을 포함시킬 경우와 뺄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15만~20만 명 정도가 독립전쟁에서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공로훈장령〉을 공포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들을 표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해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수여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두 사람뿐이었다. 이승만이 〈건국공로훈장령〉을 공포한 것은 자신만은 건국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자기 혼자 받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니까 부통령 이시영을 들러리로 세운 것이다. 망국 직후 만주로 망명해 광복되는 날까지 독립전쟁을 계속했던 성재 이시영은 건국훈장을 탈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두 달 전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한 백범 김구가 배제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들에게 다시 억압받는 상황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것은 적절한 처신은 아니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는 1960년까지 건국훈장 수상자는 없었다. 

 

외국인 수상자들
이승만 정권은 자국민에게는 건국훈장을 주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여럿 수여했다. 1953년 제임스 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과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에게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해당하는 건국훈장 중장(重章)을 수여했다. 1955년에는 에디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1957년에는 남베트남 초대 총통이었던 응오딘지엠이, 1958년에는 터키 총리였던 알리 아드난 에르테킨 멘데레스가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장개석은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탈 자격이 있었다. 나머지 네 외국인은 6·25전쟁 때 유엔군을 이끌고 싸웠다거나 자국 군사를 파견했다는 이유였다. ‘건국’은 글자 그대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운 것이다. 6·25전쟁 때 나라를 지킨 것은 ‘호국’이다. 건국과 호국이 혼재된 채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건국훈장이 남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던 하일레 셀라시에 에디오피아 황제는 쿠데타로 쫓겨났고, 응오딘지엠과 알리 아르난 에르테킨 멘데레스는 군사 쿠데타로 쫓겨났다가 사형까지 당했다. 나중에는 박정희·최규하·전두환·장면 등 대한민국 건국과 아무 상관이 없거나 친일파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인물들까지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친일파가 심사한 건국훈장
이승만 정권 이후 건국훈장을 다시 수여한 것은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 이후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는 수단으로 건국훈장 수여 재개를 결정하고 공훈 심사위원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의 훈격을 심사했다. 공훈 심사위원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이자 만주의 참의부 참의장이었던 희산 김승학과 광복군 3지대장이었던 백파 김학규,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김홍일 등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선임되었다. 문제는 공훈 심사에 참여했던 역사학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소속되어 한국사를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난도질했던 이병도·신석호를 포함해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이었던 이선근 같은 친일 역사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희산 김승학(1881~1965)은 유림(儒林)의 거두였던 심산 김창숙,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오산 이강과 함께 1960년대 생존 독립운동 3거두로 불렸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그간 모았던 독립운동 사료와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증언과 자필이력서 등을 토대로 《한국독립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김승학의 증손자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자 현재 광복회 학술원장인 김병기 박사인데,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김승학이 같은 공훈심사위원이었던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에게 “임자들이 독립운동이 뭔지 암마?”라고 묻자 아무 대답도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같았다면 나치부역혐의로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갔어야 할 식민사학자들이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심사한 결과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까? 


임정 수반들은 2등급, 3등급
대한민국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뉜다. 그런데 임정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은 1962년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았고, 임정이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뀌었을 때 내각수반인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은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다. 반면 대다수 국민들이 독립운동가인지도 모르는 임병직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임병직은 이승만의 비서이자 이승만이 미주 교포들이 내는 애국헌금을 가로채기 위해서 임시정부 직제에도 없는 구미위원부를 미국에 만들었을 때 그 위원이었다. 임병직은 1948년 12월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정을 지지했고,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유신 때인 1974년에는 한국 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았는데, 1976년 미국 뉴욕에서 사망하자 유신정권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유관순 열사에 대해  “3·1독립운동의 상징”이라면서 “1등급 서훈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을 3등급인 독립장에서 1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격상했지만 이는 유관순 열사 한 명의 서훈등급을 조정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독립전쟁의 정 반대쪽에서 활동했던 친일 역사학자들의 시각이 들어간 서훈심사 전체를 다시 손봐야 해결될 문제인 것이다. 


지금껏 계속되는 조선총독부 역사관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이 독립운동 훈격심사를 엉터리로 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뒤덮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관 장악을 위해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첫째 주요 대학 역사학과를 장악했다.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은 주요 대학 사학과를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정설(定說)로 승격시켰다. 둘째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역사 관련 국가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를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인 국사관을 만들었는데, 조선사편수회 자료 수습이 나쁠 것은 없지만 문제는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를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계승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편수회는 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이 회장이었고, 국사편찬위원회는 교육부장관이 위원장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사무국장 신석호가 총괄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사(1990)》는 신석호의 재임기간을 ‘1929년 4월~1961년 1월 21일’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계승했다고  당당하게 밝혀놓은 셈이다. 셋째 해방 직후 국사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중등국사 교원양성소를 장악해 국사교사들에게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주입시켰다. 주요대학 역사학과→역사관련 국가기관→중등국사 교원양성소→학생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해방 후에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대한민국의 주류 사관으로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극복되었나?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희산 김승학 등은 모두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다. 현재 대한민국 대학 사학과 중에서 이들의 역사관을 계승했거나 가르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국정, 검인정을 막론하고 한국사교과서는 모두 이병도·신석호 등의 식민사관을 담고 있을 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담고 있는 교과서는 없다. 심지어 국고로 운영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장이 공개 학술회의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망언한 적도 있었다. 식민사관 카르텔은 보수, 진보의 구분도 없이 진영논리도 뛰어넘는다. 이 땅에서 식민사관을 ‘진짜’ 비판하는 학자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지를 아는 국민들은 경악한다. 땅은 해방되었지만 정신, 즉 역사관은 해방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데 이어 이제는 확대론이 나오는 G7(주요 7개국)에 가입이 논의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덩치는 이렇게 커졌는데도 역사는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보는 지금의 상황은 일찌감치 종식되었어야 맞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독립운동가들의 자주적 역사관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를 위한 장정에 다시 나설 때이다.
/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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