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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역사를말하다]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③

임나일본부 살리려 ‘삼국사기’ 가짜로 몰아

남한 강단사학계의 ‘삼국사기’ 불신론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남한 강단사학계에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것이 있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행태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있으면 모두 일본인 스승들이 만든 것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히 맞다. 그런데 민족사학자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국민들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한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민족사학자들의 ‘삼국사기’ 비판론은 그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민족사학자들은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사관에 빠져서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고 비판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200년 삭감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이 탈루는 김씨(김부식)의 소홀한 허물도 없지 않으나 기실 신라사가의 삭감한 죄가 더 많으니 어찌 김씨만 책하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삭감한 것은 김부식만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신라 건국연대가 고구려·백제보다 늦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신라 역사가들이 두 나라의 건국연대를 삭감했다는 것이다.

 

신채호가 ‘삼국사기’를 비판했다는 내용은 과거 ‘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문제는 국사교과서 편찬권을 쥔 식민사학자들이 신채호의 입을 빌려 전혀 다른 내용을 전파했다는 점이다. 남의 손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 수법이다. 신채호 선생이 ‘삼국사기’를 비판한 것과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것은 상행선과 하행선처럼 완전히 다르다.

 

신채호는 ‘삼국사기’가 고구려·백제의 건국연대를 삭감했으니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연대(서기전 37)과 백제의 건국연대(서기전 18)는 상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정반대로 ‘삼국사기’의 삼국 건국연대가 모두 가짜니 수 백 년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고구려·백제의 건국연대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갈파했지만 남한 강단사학은 삼국의 건국연대를 몇 백 년씩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특위에서 펼쳐진 ‘삼국사기’ 불신론

 

19대 국회에는 ‘동북아역사왜곡특위(이하 동북아특위)’라는 조직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 나라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특위로서 국회가 오랜만에 여야를 초월해 국익수호에 나섰던 사례다. 20대 국회는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이 특위도 사라졌고, 21대 국회에서도 부활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식민사학자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동북아특위가 살아 있던 2015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주했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이 문제가 되었다. 약 60여명의 강단 사학자들이 모여서 2008년~2015년까지 약 8년간 국고 47억원을 들여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했다. 나랏돈 먹는데 재미가 들린 강단사학자들은 3년 동안 30억 원을 더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해서 특위가 그 타당성 여부 검증에 나섰다. 그 자세한 경과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밝히기로 하고 그 지도의 문제점 하나만 말하면 독도를 누락해서 그려오라고 수정기한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도를 그려오지 않았다. 독도는 일본 것이라는 것이 남한 강단사학계의 숨겨진 역사관임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동북아역사지도’의 〈고구려의 성장(120~300)〉이라는 도엽을 보면 2세기에서 4세기까지를 그린 것인데, 낙랑군은 버젓이 북한 강역을 지배하고 있는 반면 4세기까지도 한반도 남부에는 신라도 백제도 가야도 없다. 서기 4세기에도 신라·백제·가야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5년 4월 17일 이 지도의 타당성을 둘러싼 동북아특위 진술회가 열렸다. 지도제작 측에서는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가 나왔고, 지도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필자가 나갔다.

 

한 의원이 임 교수에게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대해서 묻자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그런 것 없습니다. 저도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해서 논문을 씁니다”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약 30분 후 한 의원이 홍익대 김태식 교수가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 쓴 아래 구절에 대해서 질문했다.

 

“한강 유역 백제의 정세는 어떠하였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27년(260)조에 6좌평 및 16관등제 등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완비했다고 나오나, 이는 후세 백제인들의 고이왕 중시 관념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발전 정도는 좀 더 낮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김태식,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5년)”

 

‘삼국사기’는 서기전 18년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했다고 말했다. 해방 후 남한 강단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백제가 8대 고이왕(재위 234~286) 때 건국했다고 썼고, 각종 ‘국사교과서’도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런데 남한 언론에서 미스터 가야사라고 띄우는 김태식은 고이왕 때 건국했다는 주장은 “조작”이라면서 ‘백제의 발전 정도는 더 낮추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식의 주장은 백제는 고이왕 때가 아니라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건국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태식이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를 비롯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주장한 것을 다시 추종하는 것이다. 김태식의 이글은 남한 강단사학의 스승은 이병도가 아니라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라는 것이다.

 

한 의원이 임기환 교수에게 위의 글에 대한 견해를 묻자 불과 30여분 전에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그런 것 없습니다.”라고 답했던 임 교수는 조금 전 답변을 잊어버렸는지 “학계의 견해에 위배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해 여야 의원들을 경악케했다.

 

 

‘일본서기’는 살리고 ‘삼국사기’는 죽이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 최재석 교수가 비판한 글을 보자.

 

“일본인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조작으로 모는 근본적 이유는 ‘일본서기’를 사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먼저 ‘일본서기’의 정체에 대하여 한마디 해 두어야겠다. 서기 720년에 만들어진 ‘일본서기’는 귀신이 왕이 된 귀신 7대 시대와 사람이 왕이 된 신무(神武:진무)부터 지통(持統:지토우)까지 40대의 합계 47대, 약 1800년에 걸치는 기록이다. 이 중 가장 뒷부분인 약 100년 정도의 기록은 사실에 가까우나 나머지 1500~1600년간(민달,敏達:비다쓰 내지 추고, 推古:스이고 까지)의 기록은 조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일본서기’에 대하여 비판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최재석, ‘삼국사기 불신론비판’, 만권당, 2016)”

 

한일고대관계사연구에 있어서 남북한 학계와 일본학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연구결과물을 남긴 최재석 교수의 말대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를 가짜로 몬 이유는 ‘일본서기’를 사실이라고 우기기 위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눈으로 보면 임나일본부가 허구가 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서 ‘삼국사기’를 가짜로 몰고 ‘일본서기’를 진짜라고 우긴 것이다. 그러니 현재 남한 강단사학에서 서론에서는 ‘임나일본부를 극복했다’고 말하면서 본론에 가면 ‘삼국사기’는 가짜라면서 임나=가야설을 주창하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행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최재석 교수는 남한 강단사학계가 해방 이후에도 ‘삼국사기’ 불신론을 정설로 추종하는 사실에 대해서 “기이하기까지 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가야는 임나가 아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일본서기’를 비교하면 가야는 임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가야의 건국을 서기 42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임나의 건국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숭신(崇神) 65년에 임나국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숭신 65년은 서기전 33년으로서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기 100여 년 전이다. 그 기록을 보자.

 

“임나국에서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했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북조해이재계림지서남)”(‘일본서기’, 숭신 65년)

 

이것이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위치를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는 구절이다. 임나가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 문장과 부합하는 곳은 대마도이기 때문에 남한의 민족사학자들 다수는 임나의 위치를 대마도라고 봤다. 임나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北阻海)” 있기 때문에 북쪽이 육지인 가야는 임나가 될 수 없었다. 조(阻)자는 막히다,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서기’에 따라도 임나는 가야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물론 남한 강단사학계까지 ‘임나=가야설’을 정설로 떠받드는 것 역시 “기이하기까지 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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