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경기도박물관 소장품이나 위탁품 중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1점과 보물 46점인데, 이 가운데 초상화가 무려 10점이나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 중에서도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정몽주 초상'(보물 1110-2호)에 대해 알아보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이 심했던 정몽주 초상이 보물로 지정되기까지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초상은 용인 가묘에 보관해 오던 것을, 2006년 영일정씨 포은공파종회(종손 정래정)로부터 기증받아 소장하게 됐다. 당시 유물은 옻칠된 영정함(影幀函)에 들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영정을 쌌던 보자기와 한지들이 함께 있었다.
족자 형태의 초상화는 손상이 매우 심해 펴는 것도 불가능하고 본래 모습을 추측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이에 도박물관은 유물의 보존처리와 기증자에게 제공할 이모본(移模本) 제작을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소장 박지선)에 의뢰했다.
2008년 6월 경기도박물관 소장 초상화 특별전 '초상, 영원을 그리다'에 소개된 정몽주 초상의 이모본 제작과 보존에 관한 논고에 박지선 소장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존처리를 하기 위해 처음 실견하였을 때 그 손상의 참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아마도 이 정도 손상된 초상화라면 이미 소각하여 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초상화는 궤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오늘날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기도박물관이 외부 환경에서 손상되어가는 문중 유물을 하나라도 구하고자 했던 그간의 열심과 노력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2007년 당시까지 정몽주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됐다고 알려진 것은 보물 제1110호인 숭정기사모본(崇禎己巳摹本)인데, 이는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 소장 3본 중 하나로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외에도 임고서원에는 영묘을묘모본(英廟乙卯摹本)과 일제 강점기에 모사된 것으로 보이는 1본이 보관돼 있다.
임고서원 소장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한철(李漢喆, 1808-1892)이 그린 정몽주 초상이 있으며, 지본(紙本)이기는 하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반신상이 있다.
박지선 소장은 유물의 보존처리와 이모본 제작을 위해 기존에 알려진 정몽주 초상을 참고하고자 실물 조사를 실시했다. 초상의 조사는 경북 영천 임고서원 소장 전신상 3본과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지본 반신상 1본에 대해 진행됐다.
유물의 얼굴 부분 손상이 많아 복원모사시 원형에 관한 자료조사가 필수적이었다. 조사 결과 이 유물과 임고서원 3본은 초를 대고 그린 듯이 유사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11년 12월 정몽주 초상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보물 제1110-2호로 지정됐다.
고려말 조선 초 정몽주 생존시 제작된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의 특징을 충실히 반영해 조선 중기 때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현존하는 정몽주 초상 중에서는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르다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정몽주와 용인의 인연
정몽주는 본관이 영일이고 호는 포은(圃隱)으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의 문하에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과 함께 수학했다. 1360년 문과에 장원을 하고,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375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고 이후 대제학을 비롯해 여러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학문을 익히는 데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정몽주는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해석해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으나 역성 혁명에는 찬성하지 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성리학의 정치적·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대학자이자 고려 말기의 대표적 충신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를 배향한 조선시대 서원은 전국적으로 18개에 이른다.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 7곳, 전라도 4곳, 함경도 3곳, 황해도 2곳, 경기도와 평안도가 각 1곳이다.
이 중에서 경북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황해북도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崇陽書院), 경기도 용인에 있는 충렬서원(忠烈書院), 경북 포항에 있는 오천서원(烏川書院)은 정몽주를 모시고 있는 대표적 서원으로 일컬어진다.
임고서원은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으로, 정몽주의 출생지인 영천에 위치해 있으며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 중 최초인 1553년에 건립됐다. 숭양서원은 1573년 정몽주의 넋이 서린 개성 선죽교 위쪽, 옛 집터에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면서 비롯됐다. 1575년 ‘숭양(崇陽)’이라는 사액이 내려 나라가 공인한 서원으로 승격됐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오천서원은 1588년 정몽주의 본가이자 영일 정씨의 관향에 세워진 서원이다.
정몽주의 묘역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위치한다. 정몽주 사후 처음 안장된 곳은 개성 부근의 해풍군이었다. 그러다 순절한지 14년이 되는 1406년 3월, 지금의 위치로 천묘(遷墓),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했다.
가문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는 본래 정몽주의 고향인 경상도 땅으로 천묘지를 정하고 면례행렬(緬禮行列)이 용인시 경계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명정(銘旌)이 하늘 높이 날아가 이곳(현재 묘지)에 떨어지자 모든 사람이 이곳을 명당자리라 하고 유택(幽宅)을 이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충렬서원은 포은의 묘소가 있는 지역에 서원이 없었던 까닭에 1576년(선조 9)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세워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1605년(선조 38)에 경기도관찰사 이정구, 용인현감 정종선, 진사 이시윤 등이 주도해 묘소 아래에 건물을 다시 지었고, 1608년에 사액을 받았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한 이후 몇 차례 중수가 이어졌다.
성리학과 유학이 대세였던 조선시대에 숭모열이 대단했던 정몽주를 모신 묘와 경기도의 서원 중 그를 배향한 서원인 충렬서원이 용인시 모현면에 위치하고, 그를 그린 현존 초상화 중에서 제작 시기가 가장 앞선 작품이 용인에 위치한 경기도박물관에 소장 중인 것 또한 인연 중 인연이라고 여겨진다. (글 = 박본수 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 정리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