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최용신. 그의 헌신적인 행적은 1935년 심훈의 소설 ‘상록수(常綠樹)’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이다.
안산시 상록구 상록수공원 내 위치한 최용신기념관은 최용신을 기리고자 안산시가 지난 2007년 건립한 공립박물관이며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특히 이 터는 최용신 선생이 당시 샘골마을사람들과 세운 샘골강습소가 있던 곳으로, 1931년 YMCA 교사로 샘골마을에 파견된 그는 자립심과 애국심을 기르는 교육활동과 농촌운동을 펼쳤다.
지난 20일 찾은 최용신기념관에서는 최용신이 농촌계몽운동가로서 이바지한 일생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날 하루 동안 20명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고 하며, 자녀의 손을 잡고 오거나 카메라로 역사를 담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최용신은 1908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의 본관은 경주로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12대조의 원산 귀양을 계기로 덕원군에 정착했다.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8살이 되던 1916년,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한 뒤 1918년에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 졸업 후에는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전희균 선생의 권유로 협성신학교에 진학한 최용신은 농촌사회지도교육과의 황에스터 교수를 만나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갖게 됐다.
당시 농촌은 일제의 가혹하고 체계적인 약탈의 일상화로 빈궁한 처지에 놓여있었고, 이에 사회각계에서는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협성여자신학교 하계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여하면서 한국YMCA와 인연을 맺은 최용신은 1931년 10월 10일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현 안산시 본오동)에 한국 YM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됐다.
천곡의 본래 이름은 맑은 샘이 많다고 해 샘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명이 한자로 바뀌며 천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에서 온 낯선 여성을 반기지 않았으나 최용신은 자신을 낮춰 아이들과 놀아주고 부녀자들과 일하면서 마을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선총독부가 1928년 초등 교육 확충 계획을 발표하며 이후 일면일교(一面一校) 원칙을 세워 전국 각지에 학교를 증설했으나 월사금과 일본 동화정책 탓에 취학률은 저조했다. 샘골마을 사람들은 월사금이 없는 강습소로 모였고, 최용신은 샘골강습소에서 한글, 산수뿐 아니라 초보 재봉, 수예, 노래, 성서공부 등을 가르쳤다.
체계적인 농촌계몽운동을 꿈꾸며 1934년 일본 고베여자신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한 최용신은 각기병이 악화돼 6개월 만에 귀국해야했다. 1935년 1월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병원에서 25년 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남겼다.
기념관 한쪽 벽에 걸려있는 그의 유언장을 보면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천곡 강습소부근에 묻어주오”라고 적혀있고, 실제 최용신의 묘는 기념관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 농촌수탈에 교육으로 대항한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공훈을 기린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최용신기념관 밖 공원에서 만난 시민 A(여) 씨는 “안산에 최용신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처음 와봤다”면서 “공원에 산책하러 왔다가 곧 3·1절을 앞두고 지역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게 된 좋은 기회”라고 이야기했다.
한편 올해는 최용신 서거 86주기로 안산시는 지난달 ‘추모 주간’을 운영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