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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24 - 수도국산

도시는 인류가 이룬 가장 훌륭한 업적

 도시는 인류가 이룬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유구만 남은 폐허의 도시, 현대의 도시도 그렇다. 인간과 인간이 이룬 사회는 어떤 것인가를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역사를 통해 기억되고 길이 이어갈 정신과 물질의 성취가 많지만 도시는 개인에 의존한 흔적이 아니라 사회성을 근간으로 한 집합의 흔적 그 자체다. 성장과 퇴화를 반복하는 거대한 인간이 만든 유기체, 어찌보면 또 다른 자연일 수도 있다.

 

외세의 문명을 받아들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남한 팔도 어느 도시를 가 봐도 백년의 역사적 흔적과 새로운 신생도시의 공학적 방법이 충돌한 예는 참으로 많으며 비관적이기도 하다. 도시의 매력이 상실돼 가는 엇비슷한 투쟁으로 표현되고 오래된 도시와 급조된 신생도시는 분명한 다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새 도시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후유증이 속속 곁에 와있다.

 

새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손때 묻은 물건을 애지중지하듯 사고의 전환, 바로 ‘신도시 만들기’를 ‘헌 도시 고치기’로 바꿔야 할 것이 아닌가.

 

도시의 길이라 하면 다정한 느낌이 들고 도로라 칭하면 썰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낯설기까지 한 느낌이 든다. 호칭의 문제보다 쓰임의 문제로서 길의 주제는 사람이다. 차(車)가 주제가 된 길은 유령의 길이며 사람이 빠진 도시의 풍광은 유령이 사는 풍광일 수밖에 없는 것은 걷는 길에는 평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길을 만드는 것이 살고 싶은 도시, 바로 시가(市街)다운 도시다. 도시 속 비록 거미줄 같지만 길이 없으면 공공녹지, 박물관과 쉼터가 많아도 액자 속의 풍경일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길가에 면한 건축물(집)은 사유이지만 그 기능은 공적인 것이다. 바로 도시가 열려 있고 문(門)은 도시를 향해 열리고 뒹굴며 머무르고 싶어지는 곳, 그곳이 차마 내 뼈를 묻고 싶은 도시, 번잡과 혼돈까지도 녹일 수 있는 시(詩)가 넘치는 그런 도시를 우리는 원한다.

 

하이데거가 시(詩)짓기를 집짓기로 풀이한 것처럼 ‘고유한 것’ ‘본래적인 것’으로 이것이 KEOS다. 한국 건축의 계통미는 곡선이 완만하며 굴곡의 미를 추구한 향토색 짙은 것이 장점이며 왕조의 영향이지만 천연의 경승지를 향하거나 업고 지어졌다 함이 빼어날 수(秀)다.

 

서울의 북한산을 등지고 한강의 앞자락에 띄워 그 분지를 이용, 민(民)이 살았다. 또 택리법(擇理法)과 근대도시계획이 반대되는 현상으로 빈민은 산 위에 게딱지 집을 짓고 산상(山上)에서 산하(山下)를 조소하였으나 야속한 세월의 장난일까. 이제 부자가 산상에서 산하를 희롱하니 개항장 응봉산이 그러하고 수도국산이 그럴진대 빗겨 갈 수 없는 일, 옛날은 갔구나.

 

그렇다. 어느 구보다도 얽혀있는 골목이 많고 언덕이 많고 여인의 휘날리는 치맛자락처럼 흔들리는 바람의 길, 좁은 신작로도 많았다. 그 골목에 수년 전에 저승길로 간 어머니의 그림자도 누워있으니 눈물이 그렁한 인천의 동구, 떠나간 눈빛들 잊지 못한 영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분명하다.

인천광역시 중구와 동구를 옛적에는 인천부(府) 다소면(多素面)이라 불렀다. 물이 풍부하여 농사가 잘 된다는 뜻이지만 수도국산은 예외인 것 같다.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북에서 내려오고 남한 8도의 이주민이 산기슭에 흙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오두막을 지어 다닥다닥 붙어사는 흡사 괘의 등딱지 같은 모습으로 달동네를 만든 것이다.

 

1969년 인천의 인구는 58만 명 정도였다. 중구(9만), 동구(17만) 합 26만으로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중, 동구에 살았던 큰 이유에 하나일 수 있는 것도 수도국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900년 초 노량진을 연결하는 상수도 공사 후 수돗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갖춘 이후 이곳의 명칭은 수도국산이 된 것으로, 지금도 문화재급의 제수변실이 남아있다.

 

내것 네것이 없는 한 뼘 앞마당 정이 넘쳐나는 이 수도국산이 옛날이라는 미명의 풍광으로 사라짐은 아쉽지만 어찌보면 일제의 잔재를 지워버린 또 하나의 이름을 얻으니 얼마나 좋으랴. ‘솔빛 마을’ 2100㎡의 공원과 함께.

 

잊혀지는 것은 슬픈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한 것은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설립,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좋고, 문인들의 작품으로 남아 숨 고르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말처럼 우리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며 공간의 의미가 시간의 의미를 넘어 예술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잊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 수도국산은 그 옛날을 생성시키는 공간으로 기억의 창고 속에 영원할 것이다.

 

그 시절 수도국산의 언덕은 따뜻했다. 눈물 글썽이며 흔들리던 전주의 백열등까지도./ 김학균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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