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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46. 지지대(遲遲臺) 이야기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사근현(沙斤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쉴 때에 옆에서 모시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에 꽤 고통스러웠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리어 가슴 막히는 증세도 따라서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 지역은 바로 수원의 경계이다. 말에서 내려 머무르며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대저 나의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하고, 고개이름을 지지현(遲遲峴)이라 하고 돈대를 쌓아 지지대(遲遲臺)라고 이름붙였다.

 

 
정조임금은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는 매우 서두르고, 참배를 할 때면 울음을 삼켰고 서울로 돌아가는 행차는 더디고 더디었다. 사근현은 미륵현(彌勒峴)으로도 불렸는데, 정조임금은 해마다 정월에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늘 이 고개에서 말 고삐를 멈추고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채 서성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행차 기록을 남기면서 미륵현 아래쪽에다 지지대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지시하였다.
 


지지대에서 정조는 시를 1편 짓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게 했다.
 
晨昏不盡慕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그리움 다하지 못해
此日又華城   오늘 또 다시 화성에 왔네.
霡霂寢園雨   가랑비는 능침을 적시는데  
徘徊齋殿情   내 마음은 재전을 배회하네.
若爲三夜宿   어쩌다가 사흘 밤을 묵어
猶有七分成   그래도 초상화를 한폭은 이루었다오
矯首遲遲路   더디고 더딘 길에서 고개를 드니
梧雲望裏生   바라보는 속에 오운이 피어나네.
 
오운(梧雲)은 순(舜)임금이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서거하여 그곳에 묻혔다는 뜻으로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조임금은 현륭원을 참배할 때에 반드시 융복(戎服=군복)을 착용했는데, 사도세자가 생전에 온천에 행차할 때에 군복을 입었기에 아버지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군복을 입은 것이고, 사도세자의 초상화도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정조임금이 서거하기 전 마지막 참배를 하고 환궁하는 길에 지지대 위에서 현륭원쪽을 바라보며 "새벽녘의 화성은 돌아보면 멀고먼데(明發華城回首遠), 지지대 주변에서 발걸음 또 더디어라(遲遲臺上又遲遲)." 하고는 그곳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이다.

 

 
정조임금은 오로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슬픔을 삼키고 아픔을 씹으며 임금 노릇하는 것도 좋은 줄을 모르고 24년간 왕위에 있었고, 화성의 당(堂)을 노래당(老來堂)이라 이름하고 누(樓)를 신풍루(新豊樓)라고 이름한 것도 지극한 효심을 담은 것이다.
 


지지대 이름에 얽힌 사연을 새긴 사적비를 순조8년(1808)에 세웠는데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쓰고 화성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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