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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47. 성남 백현동(栢峴洞)의 유래

 

성남시 분당구의 백현동(栢峴洞)은 조선시대 한성부 광주군 낙생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백현리라 하였다. 1973년 성남시 승격으로 백현동이 되었다.
 
백현동은 마을의 고개에 큰 잣나무가 있어 잣고개 또는 잿너머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옛 지명으로는 웃말, 아랫말, 중간말, 양지말, 수풍안, 관골, 국능골, 냇건너들, 능안골, 돌무더기들, 되링게모퉁이, 뒷내굴, 마당골, 면답들, 새능골, 서낭고개, 수풍안, 잔디너머골, 장터벌, 치아골, 한의들 등이 있다.

 
능안골은 중종 왕자인 덕양군 이기(李岐)의 묘소와 사당 정희사(靖僖祠)가 있기 때문이고, 마당골은 마을에 큰 당집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수풍안은 마을에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곳으로 수풍안골이라고도 한다. 또 한의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 걱정이 없는 곳이어서 일찍 모내기를 하는 들판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근현대사에서 반민족 행위의 거두였던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백현동 226-1에서 이석준(李奭俊)의 아들로 출생하여 9살 까지 살다가 판중추부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서울로 갔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래, 고종의 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군대 해산 등 일련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았는데, 목숨은 건졌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서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안을 가결하게 하고 8월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는 데 앞장섰다.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國賊)’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반민족행위자인데 특이하게도 그는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면서도 일본어는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반민족 행위에 앞장 선 행적과는 달리 글씨로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1926. 2. 13)는 "이완용이 사후세계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다."하였다.

 

 
옛날 한양에서 지방으로 가는 영남대로가 백현을 통과하였고 역대 임금이 봄가을로 군사훈련을 하면서 이 고장에 낙생역과 낙생행궁이 있었다. 낙생역(樂生驛) 터는 잡월드 앞 일대로 추정하고 있고, 그 일대에 낙생행궁이 있었다.

백현동 신백현중학교 앞에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강원관찰사를 지낸 고암 정윤희 묘비를 세우고 그 밑자락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보여준다. 예전에 단오날에 그네를 매어 타던 나무로 주민들이 신성시하고 있는데 판교개발로 많이 흩어져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고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이 나무가 신성하게 여겨지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옛날에 이 나무 밑에서 소를 잡아먹고 고기를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모두 배탈이 나서 죽을 고생을 한 뒤로 신목(神木)에 불결한 것을 보인 탓이라 여겨 이후로는 이 나무 근처에서 도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시원한 나무 그늘과 함께 이곳을 찾는 주민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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