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금)

  • 구름조금동두천 20.2℃
  • 구름많음강릉 24.2℃
  • 구름많음서울 20.0℃
  • 구름많음대전 21.9℃
  • 구름많음대구 22.3℃
  • 구름많음울산 22.9℃
  • 구름조금광주 22.5℃
  • 구름조금부산 21.9℃
  • 구름많음고창 ℃
  • 맑음제주 22.9℃
  • 구름조금강화 20.2℃
  • 구름조금보은 20.0℃
  • 구름조금금산 21.5℃
  • 맑음강진군 23.2℃
  • 구름조금경주시 23.0℃
  • 구름조금거제 22.0℃
기상청 제공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전쟁중에도 엄마는 아이의 저녁상을 차린다

59. 벨파스트 - 케네스 브래너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그렇게 명료하지가 않다. 분위기와 몇 개의 장면들이 마치 환등기(幻燈機)의 슬라이드 마냥 한 장 한 장씩 기억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사람들에게 있어 유년기란, 풀 숏이나 부감 숏 그리고 롱 숏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비교적 롱 테이크들이다. 클로즈업으로 떠오르는 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 정도다. 케네스 브래너의 위대한 역작 ‘벨파스트’가 딱 그렇다. 이 영화가 초반에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흑백과 롱 숏&롱 테이크와 풀 숏 위주로 촬영돼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버디(주드 힐)의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의 자태가 꽤나 그윽한 데다 여전히 예뻐 보이는데도 얼굴은 잘 안 보이게 찍혀 있다. 자나 깨나 아들 둘 걱정에 남편과 가정의 앞날에 대한 시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엄마의 표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영화 ‘벨파스트’는 1969년의 벨파스트 사태, 흔히들 북아일랜드 분쟁이라 불리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배경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핏빛 전투와 테러, 폭탄과 총탄이 난무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벨파스트 어느 동네의 한가로운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첫 대사가 엄마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다. ‘버디! 버디! 어디 있니? 저녁 먹으러 들어와라’. 그러면 골목길 사람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아들 버디에게 엄마의 말이 옮겨진다. 아이는 쓰레기통 뚜껑을 방패 삼아 아서왕 놀이쯤으로 보이는 칼싸움을 하다가 냅다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억이다. ‘엄마가 밥 먹으러 들어오래. 나 갈게!’ 바깥의 세상에서 아무리 총탄이 날아다닌다 한들 오늘도 엄마는 아이의 저녁밥상을 차린다. 그게 엄마이다. 그게 평화이다. 그게 정상의 세상이다.

 

벨파스트 한 동네의 골목길도 ‘그날’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었다. 그러나 골목 바깥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된 터였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유럽 대륙 본토에서는 무려 4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테러와 린치, 게릴라식 전투로 목숨을 잃는다. 이른바 IRA의 무장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단편적이나마 많은 영화에서 다뤄져 왔다. 짐 쉐리단의 1994년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있고 스티브 맥퀸 감독의 2008년 영화 ‘헝거’ 등이 있다. ‘헝거’는 특히 오랜 투옥 생활 끝에 정치범에 대한 권리 회복을 주장하며 단식 투쟁으로 목숨을 끊은 보비 샌즈의 이야기였다. 그가 극심하게 살이 빠지는 과정을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로 보여줘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작품이다. 이 밖에도 아일랜드 독립과 분쟁을 다룬 영화로는 닐 조단의 ‘마이클 콜린스(1996)’와 클라이브 오웬,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주연의 ‘섀도우 댄서(2012)’ 등이 있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감독으로 알려진 폴 그린그래스가 2002년에 만든 ‘블러디 선데이’는 영국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을 그린 내용으로 우리의 광주항쟁을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유명했다.

 

영화 ‘벨파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전적 지식이 필요하다. 아일랜드에서는 왜 이런 내전이 일어났는가. 모든 분쟁은 한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니다. 복합적이다. 아일랜드 사태는 멀게는 1700년대 영국 잉글랜드의 식민통치에서부터 시작돼 1918년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북아일랜드 내에서 내전으로 확대된 기독교계와 가톨릭계의 갈등 등으로 설명된다. 독립전쟁 과정에서는 비교적 하나의 아일랜드였다. 영국이 공동의 적이었다. 이때 독립운동가 마이클 콜린스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내전으로 양상은 복잡해졌다.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계가 소수의 가톨릭계 주민들을 탄압하고 몰살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의 기독교계는 아일랜드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영국령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들은 대부분 18세기 때부터 영국에 의해 북아일랜드에 정착한 이주민 후손들이다.

 

반면 북아일랜드 가톨릭계들은 아일랜드로의 통합된 독립을 갈망한다. 마이클 콜린스는 북아일랜드를 뺀 (남)아일랜드 독립에 대해 영국과 합의를 하게 되는데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리파로 간주되면서 통합파에게 암살을 당한다. 한편 북아일랜드 IRA는 기독교인들에게 저항하는 극렬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이에 대해 영국은 정규 군대를 파병하면서까지 억압정책을 펼친다. 이제 싸움의 양상은 영국 정부군 대 북아일랜드 내 IRA, 기독교 대 가톨릭, 남과 북의 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한다. 영국 의회 내에서는 아일랜드를 대변하는 신페인당의 의회 투쟁이 계속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의회주의, 비폭력주의는 IRA와 갈등을 빚게 되는 양상으로 치닫는다.

 

 

어쩌면 영화 ‘벨파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영화는 텍스트만으로도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하며 스토리와 아우라만으로도 작품 속 사건의 앞뒤 역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벨파스트’의 주된 설정은 바리케이드다. 동네 어귀에는 영국 정부군에 의해 바리케이드가 쳐지는데 이 동네가 바로 소수 가톨릭 지구이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는 명목상 안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 안은 기독교계 조직에 의한 테러 활동으로 하루하루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영화는 그 하루하루의 불안을 그려낸다. 골목길은 늘 수심의 구름 같은 분위기에 싸여 있다. 게다가 버디의 집은 가톨릭이 아니라 기독교 집안이다. 하지만 버디의 엄마, 아빠 모두 동네 사람들과 같이 자라고 같이 살아온 터, 정작 이들은 싸울 일이 없다. 오직 싸움은 바깥의 일일뿐이다. 하지만 일상의 생활은 시시각각 무너져 간다. 정치와 전쟁 따위 아랑곳없이 오로지 아들과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고, 어떻게 하든 가정을 지키려 하는 엄마의 노력은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바리케이드 밖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지만 골목 안의 일상은 어느 정도 이어져 가긴 한다. 학교에서 버디는 늘 3등을 하다가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옆에 앉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런 아이의 연애를 돕기 위해 할아버지(시아란 힌즈)는 일종의 커닝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또 그런 할아버지를 늘 비아냥대면서도 은근히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할머니(주디 덴치)의 표정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벨파스트의 오래고 거친 세월 속에서 그녀는 말을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처럼 보인다.

 

버디의 예쁜 엄마는 도박 버릇이 있는 아빠를 늘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 둘은 아직 젊다. 엄마가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남편과 생때같은 자식들 먼저, 그리고 그런 남편과 자식이 살아갈 수 있는 오랫동안 정든 벨파스트이다. 벨파스트가 없으면 가족도, 자신도 없다. 가족과 자신이 없으면 벨파스트도 없다.

 

남편(제이미 도넌)은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가 건설 일을 하고 2주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제 그만 벨파스트를 떠나자고 한다. 여자는 주저하며 이사를 감행하지 못한다. 어딜 가든 아이리시는 같은 취급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분쟁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가족은 늘 화목해지려고 노력한다. 특히 영화광인 둘째 아들을 위해 이들은 동네 극장을 자주 찾곤 하는데, 버디는 극장과 흑백 TV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란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하이 눈’, ‘치티 치티 뱅 뱅’은 그가 입을 쩍 벌리면서 본 영화들이다. 버디는 결국 그렇게, 케네스 브래너가 된다.

 

둘째 손자 버디가 집 뒷문 쪽 실외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 둔 채 변기 위에 걸터앉아 있고 그 앞에서 할아버지는 말안장을 고치는 중이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중이다. 집 뒤쪽 창가 안에 할머니가 앉아 있는데 마치 그림처럼 미동이 없다. 카메라의 움직임 없이 마치 정물화처럼 담아낸 이 장면은 일본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숏’마냥 시선을 고정한 채 롱 테이크로 이어간다. 영화 ‘벨파스트’는, 세상이 요동쳐도 내 안의 평화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우리 삶에서 오랫동안 계속돼 왔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아마도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바로 그 점을 그려내고,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엄마·아빠=가족’의 강고한 의지야말로 세상의 동력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멕시코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있다면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자 이 위대한 배우는 아일랜드엔 ‘벨파스트’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기억은 역설적이고 서정적이다. 아이가 써놓은 산문 같은 것이다. 그 순수함이 세상을 지켜낸다. 모든 전쟁과 분쟁,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년의 기억들 때문이다. 그건 곧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이다. 벨파스트들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금도 아이를 지키려 품 안에 자식을 감싸 안는 우크라이나의 여인들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인들을 위하여.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