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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알모도바르의, 알모도바르가 아닌

62. 패러렐 마더스 -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패러렐 마더스’의 제목을 어떻게 우리말로 옮기면 좋을까, 최소한 의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평행 엄마들?’ 아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것이 두 명의 엄마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을 말하고자 함이며 거기에 엄마 두 명의 에피소드를 얹혀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엄연히 이것은 우주 평행 이론 급에 해당한다. 과거의 일, 그 뿌리가 지금 현재 두 명의 여성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여성이 유린당하고 여성성이 파괴되는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 그것이 평행이론이고 또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평행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냥 영어 제목을 쓰는 것이 낫게 된다. 제목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영화는 그 순간 확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약간 실망감을 느끼게도 되는데 그건 순전히 이 작품을 만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탓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지금껏 이렇게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모티프를 자신의 영화에 섞은 적이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답지 않다. 알모도바르가 찍은 것 같지가 않다. 알모도바르는 지금껏 40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면서 늘 성적 욕망과 그것에 대한 구원, 인간이 갖는 양성성의 본질, 남성들이 회복해야 할 여성성과 모성애의 정서 등에 대해서 얘기해 왔다. 그의 영화는 늘 개인의 구원에 맞춰져 왔으며 정치나 역사와 같은 거대담론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알모도바르의 매력이었다. 종종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성적 판타지에 대한 묘사와 그 수위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낙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 ‘패러렐 마더스’는 스페인의 아픈 과거사를 가져와 그것에 대한 씻김굿을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현재의 여성 둘의 임신과 출산,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 등등은 사실 메인 테마가 아니라 곁다리였다. 어쩌면 그 얘기 자체가 맥거핀이라는 생각도 든다. 알모도바르가 정작 얘기하고 싶은 것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고 그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번에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은 셈이다. 그건 매우 신선한데다 알모도바르가 이제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볼 만큼 늙고 현명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의 성적 도발성이 약화된 것 같아서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얘기의 시작은 주인공 여자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가 남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야니스는 사진작가이다. 주로 패션 쪽 상업적인 작품을 찍는다. 아르투로는 법의학자로서 발굴 전문가이다. 그는 역사기억보존협회 같은 이름의 기관에서 일을 한다.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와 그의 마을 사람들이 묻혀 있다고 추정되는 장소를 발굴해달라고 요청한다. 둘은 마음이 맞고 이데올로기가 맞는다. 당연히 눈이 맞는다. 그래서 비교적 격렬한 섹스를 한다. 그리고 임신을 한다. 남자는 유부남이다.

 

여자는 싱글 맘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건 자신의 엄마도 그랬고 자신의 할머니도 그랬다(할아버지가 학살됐기 때문에 할머니는 결과적으로 싱글 맘이었다). 그래서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말한다. “집안의 전통대로 애를 낳을 거야. 내가 키울 거야”. 야니스는 아르투로와 헤어진 후 아이를 낳는다. 병원에는 자신과 같은 임산부가 있는데 아나라는 이름의 미혼모, 어린 여성이다. 야니스와 아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딸을 출산한다. 둘 다 건강했으며 둘 다 행복했다. 그러나 곧 야니스는 두 아이가 신생아 격리실에서 바뀐 사실을 알게 된다.

 

 

알모도바르는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와 이야기 전개를 배배 꼬기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그렇다. 자신이 키우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야니스는 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아나가 키우는 (자신의 실제)아이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것을 뒤늦게 알고,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남자 아르투로와 헤어진 야니스는 아나를 만나 그녀를 위로해 주는 과정에서 동성애에 빠진다. 야니스는 아나와 섹스를 한다. 비밀을 지킬 수 있다면 아나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도 빠진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르투로가 아내와 별거를 하고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다. 둘은 유적지 발굴을 하기 위해 함께 그녀의 고향으로 향한다.

 

영화의 시작, 설정은 마치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닮았다. 거기서도 두 남자는 각자 키운 아이가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레에다는 두 아이를 실제로 다시 바꾸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특히 ‘패러렐 마더스’를 보고 있으면 그게 현실적이고 가능한 얘기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을 다시 바꾸기보다는 대부분은 비밀을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모성이나 부성이라는 것은 천부적이고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꽤나 후천적이고 교육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키운 아이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혈육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모도바르식으로 같이 키우면 된다. 새로운 가족 공동체, 이성과 동성을 뛰어넘는 양성성, 선의의 쓰리섬을 받아들이면 된다.

 

 

스페인 내전을 약간이라도 알고 보면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가 있다. 스페인 현대사는 거의 내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프랑코 총통이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프랑코파와 공화파의 전쟁은 2차 대전의 전초전이라 불릴 만큼 세계적인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지식인 의용군들이 국제 여단을 만들어 이 내전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내전은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로 재생됐는데 앙드레 말로의 『희망』이라는 작품,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어졌다. 멕시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공포영화로 스페인 내전의 어두운 세계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패러렐 마더스’를 수작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좋은 작품, 좋은 의도의 영화가 꼭 수작이나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엉뚱하게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가 생각이 난다. 그 영화는 영화 속 화자와 에피소드보다는 한지(韓紙)의 중요성, 역사성이 강조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중요하다고 그걸 너무 앞세우면 영화가 이상해진다. ‘패러렐 마더스’가 그렇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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