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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64.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

 

수원의 화성은 정조(正祖) 때 쌓은 것으로 일반적인 성곽하고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정조는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으니 내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였다.
 


1792년 겨울에 정조 임금이 다산에게 축성 설계를 맡겨 예산 4만 냥을 절약하였다. 이 때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이 별세하여 상중(喪中)이었다. 옛날에는 부모 상중에는 거의 업무를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임금이 일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고금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내려 인중법(引重法)·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게 하므로, 다산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써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축성을 마친 뒤에 임금이 이르기를,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하였다.

 

 


 
화성을 쌓은 통계를 보면 돌덩이 18만 개가 사용되었고, 총 공사비는 87만 냥으로 당초의 예산보다 4만 냥이 절감되었다. 큰 돌 하나를 옮기는데 소 40마리가 동원되었고, 기중가(거중기)를 사용함으로써 공사 기간은 8년이 단축되었다. 또한 공사 인부들에 대해서는 노임을 성과급제로 하였다.
 
화성을 축성하게 된 데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부 읍치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수원의 새로운 읍치를 조성하게 된 것이 사유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隆陵)이라 하고 주변 지역에 나무를 대규모로 심었다.

 

 
현륭원 조성을 마친 후 정조는 심은 나무의 통계를 낼 것을 다산에게 지시하였다. 다산의 천재성이 이 때에도 발휘된다. ‘식목연표’는 현륭원에 심은 나무 숫자를 기록한 표이다. 정조가 다산에게 식목부(植木簿)를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7년 동안(1789~1795) 8읍(수원·광주·용인·과천·진위·시흥·안산·남양)에 나무를 심은 데 대한 장부가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데, 그 공로는 누가 더 많은지, 나무의 숫자는 얼마인지 아직도 명백하지 않으니, 네가 그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간략하게 간추려서 되도록 명백하게 하되 1권이 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정약용이 물러 나와서 연표를 만들었는데, 가로 12칸을 만들고 7년을 12칸에 배열하였다. 세로 8칸을 만들어 8읍을 배열하였다. 1칸마다 그 수를 기록하고 그 총수를 계산하니, 소나무‘松’·노송나무‘檜’·상수리나무‘橡’ 등 여러 가지 나무가 모두 1200만 9712그루였다. 그 끝에다 이 숫자를 기록하여 올리니, 임금이 "한 권이 아니고서는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겼는데,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분량의 문서를 너는 종이 한 장에다 마무리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며, 오랫동안 감탄하였다.
 
정조와 다산의 만남은 풍운지회(風雲之會)였다. 용이 바람과 구름을 얻어서 기운을 얻는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수어지교(水魚之交)가 있다. 물고기는 반드시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임금과 신하가 친밀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연춘헌에서 갑자기 서거하고 곧 다산은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