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한 혁명가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농림학교를 졸업한 전일은 일찍이 북간도로 넘어가 광복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다음 연해주로 건너간 전일은 일본군과 반혁명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극동소비에트 정부를 지키기 위한 적군의 하바롭스크 방어전에 참전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여성혁명가였던 김 알렉산드라가 외무장관으로 있던 극동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시베리아주둔 일본군의 철퇴와 병사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유인물 5만 부를 배포하려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전일의 재판을 맡은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본업은 조선독립운동이올시다.”
그렇다면 왜 사회주의운동을 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을 받은 전일의 대답은 간단했다.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함이고, 사회주의는 세계를 위함이오.”
거침없는 그의 기세에 밀린 검사가 ‘피고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라고 질책하자 전일은 주저 없이 응수했다.
“나의 몸은 일본 법률로 제재할 수 있겠으나 일본의 법으로 내 정신을 제재할 수는 없소. 일본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소.”
경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그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일본은 사기와 협박으로 우리의 국토를 강탈하고 이천만 민족을 노예로 삼았으니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독립을 위해 싸울 것으로 확신하오.”
5년의 징역형을 확정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전일은 독립운동가 12명과 함께 비밀 결사대 ‘적유의용단’을 만들고 간수를 때려눕힌 다음 탈옥을 감행했다. 탈옥 이틀 만에 체포된 전일은 도주와 상해, 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4년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8년 만에 석방된 전일은 본업인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세 차례 체포되어 5년 넘는 징역을 살았다. 1934년 평양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그는 경성에서 잠시 머물다 고향 길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체포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본업인 조선독립운동과 부업인 사회주의혁명 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전일을 일제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전일이 처형당한 지 20년 만인 1957년에 러시아 군사재판소는 ‘혐의없음’ 결정과 함께 복권 조치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전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러나 해방 80주년을 눈앞에 다가온 지금도 그의 유해는 하바롭스크 공원묘지에 방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