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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일대기] 無수저 소년공이 삼수 대통령이 되기까지

경기도지사 출신의 최초 대통령 기록
불공정 속 ‘공정한 세상’ 향해 나아가
노무현 한마디에 인권변호사 결심
‘성남시립의료원’ 계기로 정계 입문
성남시정·경기도정 운영으로 실력 입증
대선 3차례 도전 끝에 49.42% 당선

 

‘경기도지사 출신 최초 대통령’, ‘역대 선거 최대 득표수 당선’ 등 정치역사상 최초·최대 수식어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을 나타내는 인생 첫 수식어는 단연 ‘소년공’이다.

 

남의 이름을 빌려 공장에 들어갔던 13살 소년공 이재명. 참혹한 가난이 그의 삶에 ‘불공정한 세상’을 어김 없이 끌어들일 때마다 꿋꿋이 ‘공정한 세상’을 향해 뻗은 그의 한걸음 한걸음은 2025년 6월 국민의 부름으로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갔다.

 

49.42% 득표율로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나는 겁이 없다. 살아가며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날 때부터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왔기 때문(책 ‘이재명은 합니다’)”이라고 말한다.

 

◇온몸에 흉터 가득한 소년공…‘생존’ 검정고시 공부

 

 

1964년 12월, 경북 안동 화전민 가정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재명 대통령의 어린 시절은 철저한 가난 그 자체였다. 먹을 것이 부족해 진달래 꽃과 산나물 캐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국민학교(초등학교)는 집에서 왕복 10여 km의 산길을 걸어 다녀야해 결석이 잦았다.

 

이 대통령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이 10살 무렵 고향을 떠난 부친이 있는 경기 성남 상대원시장으로 터를 옮겼다. 그러나 아홉 식구가 빈민촌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현실에 이 대통령은 중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법적으로는 취업이 불가능한 나이였지만, 생존을 위해 그에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동네 형의 이름을 빌려 성남의 고무공장에 들어가 6년간 ‘이름 없는 소년공’의 삶을 지내야만 했다.

 

3개월을 꼬박 일하고도 사장의 야반도주로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기도 했고, 냉동회사에서 함석판을 접고 자르는 일을 하며 몸에는 100개가 넘는 흉터가 생겼다. 시계공장에서는 독한 약품에 장시간 노출돼 후각을 잃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왼쪽 팔이 프레스 기계에 으스러지며 장애를 얻었다.

 

공장 내 폭력에도 시달려왔던 이 대통령은 지옥 같은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남에게 얻어터지지 않고 산다 ▲돈 벌어 가난에서 벗어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산다는 목표를 세운 것도 이때다.

 

◇“변호사 해보니 안 굶더라”…노무현의 한마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20살에 중앙대학교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한 이 대통령은 당시 캠퍼스 내에 가득했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뒤로한 채 사법고시에만 몰두했다. 생존을 위해 시작했던 학업이었기에 유일한 생명줄이던 대학생 신분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대학 시잘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며 사회의 ‘거악’을 인식했고, 이후 공익적 삶을 살게 만든 계기가 됐다고 회상한다.

 

이 대통령은 대학 졸업 1년 후인 198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판·검사의 경력 없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도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마디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변호사였던 노 전 대통령은 연수원 강의에서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해라. 변호사 내가 해보니까 절대 안 굶는다”는 이 한마디가 이 대통령을 인권변호사로서의 삶으로 이끌게된 것이다.

 

◇불공정한 세상을 향한 ‘변호사 이재명’의 반격

 

 

1989년 이 대통령은 제2의 고향인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공단 노동자와 도시 빈민 노동자 등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사람들을 위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이다.

 

그러던 중 온 이 대통령은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구성원으로 참여하며 시민운동가의 길로 들어선다. 2003년 성남시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 폐업으로 의료공백이 발생하자 ‘공공의료기관’ 설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성남 시민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립의료원설립 조례안이 상정됐다. 그러나 당시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시의회에서 토론도 생락한 채 47초 만에 이를 부결시켰고 이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하던 이 대통령은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잡으러 다니던 경찰을 피해 성남주민교회로 몸을 숨긴 이 대통령은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지하기도실에서 ‘정치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성남시장에 도전했다.

 

◇성남시장부터 경기도지사까지

 

 

2006년 성남시장 선거와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연거푸 낙선했다. 그러나 꾸준히 정계에 문을 두드린 이 대통령은 2010년 세 번째 도전 끝에 51.2%의 득표율로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이 대통령은 이번 대선 유세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성남시장 시절을 꾸준히 언급했다. 취임 직후에는 지방정부 최초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실제로 3년 6개월 만에 청산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해 청년 배당·무상 교복·공공산후조리 지원 등 ‘3대 무상복지 정책’을 추진하고,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지방재정 배분 방식을 변경하자 보편복지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주장하며 11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집회’에 참석해 정치인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며 대중에게 각인됐다.

 

인지도를 크게 올린 그는 2017년 19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되며 ‘새로운 경기, 공정한 세상’ 기조 아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고, 전국 최초 24시간 닥터헬기 도입, 도내 계곡 불법업소 96% 1년 만에 정비 등 성과를 냈고, 물리력 동원 없이 상인과 토론하는 모습은 또 한번 대중에게 ‘정치인 이재명’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제21대 대통령 이재명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쳤지만, 2020년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고 2022년 20대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도전했으나 윤석열 전 대통령과 0.73%p 차로 또 한 번 고배를 마셨다.

 

2022년 대선 과정에서 ‘대장동 게이트’가 터져 나왔고, 2023년 2월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이 대통령은 부결을 호소했지만 ‘비명’(비이재명) 의원들의 이탈로 가결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월에는 흉기에 목을 찔리는 피습사건을 겪는 등 정치적·신체적 위기를 모두 넘긴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로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직전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지난해 12월 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국회의사당 입구가 봉쇄되자 그는 담장을 넘고 의원들을 국회로 집결하며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며 이번 대선에서 49.42%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저는 흙수저도 아닌 무(無)수저”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 대통령은 이제 “제가 탈출해 버렸던 그 웅덩이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좌절하고 고통 받으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 경기신문 = 김한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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