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 차원에서 화투 놀이나 운동 경기를 하다가 사소한 걸로 다툼이 일어나 마침내 큰 싸움에 이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대개는 그 게임의 규칙을 두고 일어나는 다툼이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 죽기 살기로 나서서 우기는 사람이 있다. 꼭 있다. 예컨대, 축구 경기에서 자살골이 터졌는데, 자살골은 골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는 제법 논리적인 주장인 양, 골은 반드시 상대가 공격해서 상대 선수가 넣는 골만이 정정당당하다고 우긴다. 그에게 FIFA(국제축구연맹) 규정을 들이밀며 자살골도 엄연한 골이라며 다그쳐 보아도 그는 막무가내 우긴다. 그건 FIFA 규정이 잘못된 것이란다. 독선의 극치를 본다고나 할까. 그의 우기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무슨 근거로 자살골은 골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냐? 근거를 대라고 다그친다. 그는 이게 무슨 근거가 필요한 거냐고 버틴다. 근거 없는 규칙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되 몰아붙이면 그는 조금도 밀리지 않으면서, 마침내 우기기의 끝장 끝판을 보여 준다. “야, 우리 동네에서는 진작부터 자살골은 골로 치지 않는 축구를 해 오고 있단 말아야. 뭘 좀 알고 이야기하란 말이야!” ‘우기다’의 사전적
뉴스(News)의 의미는 ‘새로운(new)’에 방점이 있다. 뉴스(News)란 ‘New’의 복수 형태로부터 유래하여, 14세기 중세 영어에 처음 등장하였다. 학창 시절 흥미롭게 들었던 뉴스(News)의 어원, 즉 동서남북(North, East, West, South)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는 건 잘못된 속설이란다. 뉴스의 어원을 이렇게만 알았던 나는 여기서부터 가짜 뉴스에 휘둘린 셈이다. 신문 방송 등 미디어가 제도로 진화하면서 뉴스는 그 생태가 자못 복잡해졌다. 뉴스는 뉴스 가치(News Values)에 의해 선택된 사실(사건)이다. 즉, 어떤 새로운 사건이 뉴스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해야 하고, 선택된 뉴스(버려지는 뉴스도 많다)도 보도의 조건과 관습에 맞게 언어화하고, 보도와 소통의 틀에 맞도록 재구성한 이야기가 되어,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뉴스가 된다. 가짜 뉴스(fake news) 논쟁이 급증하고 있다.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가짜가 개입할 수 있는 소지가 전혀 없다 할 수 없겠다. 정치인들은 정쟁의 시작과 끝을 가짜 뉴스 논쟁으로 소모한다. 가짜 뉴스 없이는 아예 정치를 하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심지
말은 사라진다. 반면에 글은 남는다. 말은 음성(소리)이어서 사라지고, 글은 문자(형태)이어서 남는다. 말이 존재하는 양식은 ‘사라짐의 양식’이고, 글이 존재하는 양식은 ‘보존됨의 양식’으로 구분되어왔다. 말은 사라지는 속성으로 인하여 그 존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즉 말은 해버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금방 소멸한다는 현실 앞에 취약하다. 이것이 우리의 통념이었다. 말은 빅 히스토리(Big History) 차원에서 살펴봐야 할 정도로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사피엔스’의 진화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인지 혁명도 사피엔스가 말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두텁고 오랜 말의 역사에 비하면, 글의 역사는 보잘것없다. 그런데 말이 있어서 글이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는 놓친다. 말의 역동이 최고조에 달함으로써, 글을 탄생시킨다. 문명사회에서 글은 말을 주변으로 밀쳐내고, 지식과 문화를 거머쥐는 권력의 자리에 임한다. 말은 낮은 백성들의 세상 언저리를 지킬 뿐이었다. 말이 지니는 존재성의 취약함, 즉 말은 현실에서 금방 소멸한다는 점은 생각해 보면 숨은 함의가 많다. 이는 말의 위상을 거룩하게 만들기도 하고, 속되게 만들기도 한다. 유일신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