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딕션(Diction)’이라는 외국어를 칼럼의 표제어로 하면서 좀 망설였다. 하지만 현대인의 말하기(speech) 소양으로, 정확하면서도 유창한 발음 구사 능력을 주제로 삼자니, ‘딕션’이란 용어를 피해 가기 어렵다. 일부 사전에서는 ‘딕션’을 ‘정확성과 유창성을 두루 갖춘 발음’으로 풀이한다. 그런 점에서 ‘딕션’과 ‘발음’은 그 의미역이 다르다. 우리는 ‘발음’이란 말의 의미를 ‘딕션’의 의미처럼 넓히지 못하였다. 즉 ‘발음’을 그냥 소리 자체에만 묶어 두었을 뿐, 인간의 실제적 언어생활에서 수행하는 모든 ‘발음 현상’으로 확장하여 ‘발음의 뜻’을 적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용 및 기능 맥락이 풍부한 ‘딕션’이라는 말을 빌려와 쓰고 있는 셈이다.
정확한 발음만으로는 효과적인 발음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발음은 정확성과 더불어 유창해야 한다. 발음이 유창하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발음이 단순한 소리로 그치지 않고, 그 발음이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어휘, 문장, 문단 등의 의미나 구조와 잘 맞물려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내용의 의미 및 주제와 호응해야 함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발음이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는 내 말하기의 리듬, 템포, 억양, 정서적 분위기, 논리적 흐름 등에 알게 모르게 가닿아 있어야 한다. 이를 발음의 유창성이라 한다.
딕션은 이런 개념과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발음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딕션이란 만만치 않은 소리 분별력과 함께 내가 말할 텍스트에 대한 고도의 감수성을 요구한다. 어떤 특정의 연설이나 강연이나 설교나 방송 진행 등이 유독 내 귀에 잘 들린다면, 전달자의 딕션이 어떠했는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공연 콘텐츠가 들을 만했다면 무대의 인물이 어떤 딕션으로 나의 청각적 호응을 불러들였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딕션은 배우, 가수, 방송인들에게는 익숙한 용어다. 그들은 딕션과 관련하여 무수히 닦달을 받으며, 딕션 내공을 쌓은 사람들이다. 스피치 전문가들은 말하기 수행(performance)의 기본 기능으로 딕션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딕션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발음이 총체적으로 뛰어난 음성적 전달력을 지녔음을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의 총체적 말하기 역량은 발음 따로, 어휘 따로, 표현 따로, 내용 따로, 태도 따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딕션 능력이란 간단하지 않다. 발음이란 것이 그것 하나로 고립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훌륭한 스피치 수행의 깊은 맛을 터득하는 것이다. 마치 골절로 아픈데도 그 영향이 몸 전체에 유기적으로 퍼져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드라마에서 배우 김혜자 씨의 극중 캐릭터에 우리가 은연중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딕션이 주는 깊은 호소력 때문이 아닐까. 유재석의 방송 진행이 오래 호응을 얻는 것은 그의 딕션이 지닌 유창성 때문이 아닐까. 명가수 패티 김 노래의 오묘한 매력은 그녀의 가사 딕션이 명료하고 유창한 데서 생성되는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