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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저만치

 

4월이 가고 있다. 봄은 천지에 완연해지고 꽃은 누리에 화사하다. 봄과 꽃, 이 둘은 서로 어떤 인과로 이어지는가.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가. 꽃이 피어서 봄인가. “그게 그거지, 아무튼 봄은 봄이다,”하고 말 것인가. 하지만 자분자분 짚어 보면 좀 다르다. 꽃을 지각(知覺)하는 우리 마음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 건’ 자연의 법칙에 해당하는 것이고, ‘꽃이 피어서 봄을 느끼는 것’은 심리적 지각에 가깝다.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감흥이다. 감흥이란 아름다움을 느끼는 즐거움의 일종이어서, 누구나 그 감흥을 더 확장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 꽃을 다 내게로 당겨오고 싶을 것이다. SNS에 사진 콘텐츠들이 왕성하게 소통되면서 봄이 되면 휴대전화 안에도 꽃이 그득하다. 산과 들의 꽃들, 골목과 갓길의 꽃들, 옆집 담 너머의 꽃들, 정원과 마당의 온갖 꽃들, 심지어 아파트 베란다의 꽃들, 그리고 실내 탁자 화병에 담아 둔 꽃까지, 꽃은 도처에 있다. 이런저런 꽃의 표정과 자태가 휴대전화 안에서 요란하게 오간다.

 

먼 산의 꽃은 넉넉한 울타리처럼 바라볼 수 있어 좋다. 들녘에 하늘거리는 꽃은 멀리서도 고운 눈길 줄 수 있어 좋다. 그러나 그걸로 성이 차지 않는다. 자꾸만 꽃을 내 몸 가까이 두고 싶다. 꽃사랑에 대한 자기 애착도 깊어진다. 아파트 베란다에도 화분 사서 채우고, 방안에는 꽃꽂이와 꽃다발이 들어오고, 꺾어서 자른 꽃들은 식탁 화병에 꽂혀 얼굴을 맞댄다. 이렇듯 꽃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지점, 꽃사랑이 꽃 자랑과 꽃 호사로 넘어가는 어떤 지점에서 꽃의 ‘미적 의미’는 밀려나고 ‘욕망의 기호’로 변전한다.

 

우리는 꽃을 얼마나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자연의 섭리 속에서 꽃도 그 존재가 자유롭고, 우리 인간의 시선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거리는 어떤 거리인가. 거리를 두고 대상을 본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집착과 욕심은, 거리를 몰아내고 무조건 가까우려고만 한다. 거리는 그 자체에 어떤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그걸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라고 말한다. 이는 물론 심리적 거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꽃을 바라볼 때, 얼마나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은가. 천재 시인 소월(素月)은 그의 시 ‘산유화(山有花)’에서 이런 구절을 던져 준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저만치’라는 거리는 먼 거리인가 가까운 거리인가. 한국 사람들이 ‘저만치’라고 했을 때는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저만치’는 심리적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저만치’는 참으로 오묘한 거리이다. 한국인의 심리적 거리로 ‘저만치’는 아름다워서 넉넉한 거리, 넉넉해서 아름다운 거리일 수 있다.

 

소월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사랑하라(바라보라)고 한다. 꽃을 사랑하되(바라보되) 저만치 혼자 있게 하라 한다. ‘저만치’는 어떤 거리인가. 꽃으로 표상되는,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하는 마음의 거리이다. 너그럽게 바라다보고 오래 마음의 상으로 남길 수 있으려면 ‘저만치’의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저만치’는 집착을 털어내는 거리이고, 동시에 내 마음 안에 어떤 영원성을 심는 거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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