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사료에 안 나오니 가짜라는 주장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들을 보면 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용을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하긴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처럼 칼 들고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깡패가 붓을 잡은 후 한국사 연구의 대가로 대접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인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는데, 그 중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2)라는 인물이 있다. 마에마 교사쿠는 조선총독부의 통역관이었는데, 1925년 ‘신라왕의 세차(世次)와 그 이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삼국사기』 소지왕(炤知王) 이전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확고부동의 단안(斷案)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이전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소지왕의 재위연대는 서기 479년부터 500년까지이니 이를 따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500년 이상 가짜가 된다. 그런데
이병도가 존경한 식민사학자들 쓰다 소키치는(津田左右吉:1873~1961)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와 함께 지금도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이른바 태두(?)라는 이병도의 회고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병도는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쓰다 소키치에게 배웠다. 이병도는 1982년 4월 『광장』지에서 와세다 시절 일본인 스승들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의 강사(그 후에는 교수)인 쓰다 죠오끼지(津田左右吉:쓰다 소키치) 씨와 또 그의 친구인 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 동경대 조선사교수:이케우치 히로시) 씨의 사랑을 받아 졸업 후에도 이 두 분이 자기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보내 주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원래 남의 논문이나 저서를 많이 보아야 연구방법이나 학식의 향상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일본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이 분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지만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이병도가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흠모하
이마니시 류의 ‘삼국사기’ 불신론 한국 강단사학자들이 아직도 존경해 마지않는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다.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실무를 맡으면서 경성제국대 교수도 역임했다.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는 가짜고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극력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사연구(1933)’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대부분 조작되었다면서 “신라 제1왕 박혁거세 즉위년은 후대의 왕위계승의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박혁거세의 즉위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후대의 왕위계승의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그 후대의 왕이 누구이며, 어떻게 계산했더니 성립되지 않는지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우기는 것뿐이다. 이마니시 류는 또한 “문헌이 없는 시대의 즉위연대가 이렇게 뚜렷할 수가 없다”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가짜로 몰았다. 문헌이 없는 시대라는 것도 이마니시의 억지에 불과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한국 역사학계에는 다른 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교리들이 있다. 국민들에게는 비밀로 삼고, 자신들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교리다. 그중 하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만든 가짜라는 논리다. 한국 국민들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삼국의 건국시기를 물으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신라는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나라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 사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때 만들었던 국정 교과서와 현 정권에서 사용하는 검인정 교과서는 큰 차이가 있을까? 99%는 그 내용이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천재교육에서 발행한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보자. 이들은 삼국의 건국시기를 부정하기 위해 ‘국가의 기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국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는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2세기, 백제는 3세기, 신라는 4세기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33~146) 때, 백제는 8대 고이왕(재위 234~286년) 때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 ‘일본서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주갑제(周甲制)를 이해해야 한다. ‘주갑(周甲)’이란 만 60년을 뜻하는 환갑(還甲)과 같은 뜻이다. 동양 고대 역법(曆法)의 간지(干支)가 한 바퀴 순환하는 것이 주갑이다. 간지(干支)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나뉘는데, 천간은 갑을병정((甲乙丙丁)…등의 열개이고, 지지는 자축인묘(子丑寅卯)…등 열두 개다. 천간에서 갑(甲)을 따고 지지에서 자(子)를 따서 첫해가 갑자년이고, 둘째 해가 을축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지가 한 바퀴를 돌아 만 60년이 되는 것을 주갑(周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초 중의 기초인 연대부터 맞지 않기 때문에 주갑제를 이용해 2주갑 120년을 끌어올려 연대를 맞춰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가 주갑제다. ‘일본서기’의 연대가 맞지 않는 것은 편찬자의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먹고 연대를 조작한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 연대는 놀랄만큼 정확하다. 1971년 공주에서 우연히 무령왕릉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무령왕이 “계묘년 5월 병술 삭(朔) 7일 임진일에 붕어하셨다”말하고 있다. 서기로 환산하면 523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
네 나라가 공시에 조공을 바쳤다? ‘일본서기’는 한 마디로 평가하면 조공에 한이 맺힌 역사서다. 야마토왜가 조공을 받았다는 기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백제의 제후국(담로)이었던 야마토왜를 황제국으로 변조하면서 중국 역사서들의 조공 기사에 착안해 조공 기사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조공 기사에는 나가도 너무 나간 내용들이 많다.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일본서기’ 흠명(欽明)기 원년(540) 8월조에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사신을 보내 헌상하고 겸해서 조공을 바쳤다”는 구절이다. 고구려의 안원왕과 백제의 성왕, 신라 진흥왕이 나란히 야마토왜의 흠명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임나는 별개로 치더라도 이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가 아는 고구려·백제·신라라면 유치원 아이들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서명(舒明) 10년(638)조에도 ‘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조공을 바쳤다’고 나온다. 638년은 562년 가야가 신라에 망한지 76년이 되는 해이다. 가야가 임나라면 망한 지 76년 되는 나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극우파 사학자들과 이들과 한 몸인 남한
서기전 28년에 임나가 있었다는 ‘일본서기’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가야와 임나는 동일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물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처음 만든 논리다. 그런데 ‘임나=가야설’은 민간인 식민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본 참모본부(參謀本部)가 조직적으로 퍼뜨린 논리이기도 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6년 후인 1882년에 육군참모본부는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考)’라는 임나 관련 저서를 간행했다. 가야가 임나이자 야마토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책들이다. 임나(任那)는 일본어로 미마나(みまな)라고 한다. 미마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반 노부토모(伴信友:1773~1846) 등의 일본 극우파 학자들은 미마나가 ‘일본서기’상의 10대 임금인 숭신(崇神:재위 서기전 97~서기전 30)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반 노부토모는 일본을 대황국(大皇國), 즉 ‘위대한 천황의 나라’라고 주장했던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8) 일본 국학자다. 일제가 스스로를 황국(皇國), 자국 군대를 황군(皇軍)이라고 부르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이다. ‘일본서기’나 ‘고사기’,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 등에는 숭신의 이름이 일
남한 강단사학계의 ‘삼국사기’ 불신론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남한 강단사학계에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것이 있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행태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있으면 모두 일본인 스승들이 만든 것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히 맞다. 그런데 민족사학자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국민들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한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민족사학자들의 ‘삼국사기’ 비판론은 그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민족사학자들은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사관에 빠져서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고 비판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200년 삭감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이 탈루는 김씨(김부식)의 소홀한 허물도 없지 않으나 기실 신라사가의 삭감한 죄가 더 많으니 어찌 김씨만 책하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삭감한 것은 김부식만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신라 건국연대가 고구려·백제보다 늦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신라 역사가들이 두 나라의 건국연대를 삭감했다는 것이다. 신채호가 ‘삼국사기’를 비판했다는
일본 ‘건국기념의 날’ 일본은 2월 11일은 국가공휴일인 ‘건국기념의 날’이다. 지금부터 2680년 전인 서기전 660년 2월 11일에 초대 신무(神武)천황이 즉위하면서 야마토왜(大和倭)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혈통이 지금껏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이어진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실제로 2680년 전인 서기 전 660년 2월 11일 건국했다고 믿는 일본인은, 극소수의 극우파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문헌사료는 물론 유적·유물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야마토왜는 이르면 서기 3세기 말 경 가야계가 큐슈지역에 ‘진출’하면서 시작한다. 가야계가 ‘정복’한 것이 아니라 ‘진출’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열도에는 철갑으로 무장한 가야계의 진출을 저지할 정치세력 자체가 없었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 2월 11일을 ‘건국기념의 날’로 제정한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건국기사를 서기로 환산한 것이다.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분석하기 전에 역사서의 형태를 크게 나누면 기전체(紀傳體) 사서와 편년체(編年體) 사서의 두 종류가 있다. 기전체 사서는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황제들의 사적인 기(紀)를 중심에 배치하고,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
◇ 이른바 젊은역사학자모임에서 낸 책 몇 년 전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한 학구파 목사님이 필자의 책을 보고 전화를 주셨다.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영성원도 운영하는 목회자인데, 필자의 역사관과 다른 학자들이 쓴 책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른바 젊은역사학자모임이 지었다는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을 소개했다. 이 책은 ‘역사비평’이라는 역사잡지에 실은 논문들을 묶은 책이다. 이른바 젊은역사학자모임은 기경량, 위가야, 신가영, 안정준 등을 지칭하는 것인데, 당시 이들이 ‘역사비평’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비판’이란 논문들을 게재하자 ‘조선일보’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칭찬하고, 한겨레·경향·한국일보 등에서 대서특필해 찰떡같은 좌우공조를 자랑했다. 얼마 후 그 목사님이 다시 전화를 주셨다.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을 다 봤다면서 “무슨 이따위 인간들이 다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 서점의 독자 서평도 비판 일색이었는데, 그중에 “자칭 전문가인 그들은 우매한 대중을 꾸짖는다. 아직 배움 중인 젖비린내 나는 글을 책으로 내는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라는 비판도 있다. 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현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