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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② 백제와 왜의 관계를 거꾸로 쓴 ‘일본서기’

 

일본 ‘건국기념의 날’

 

일본은 2월 11일은 국가공휴일인 ‘건국기념의 날’이다. 지금부터 2680년 전인 서기전 660년 2월 11일에 초대 신무(神武)천황이 즉위하면서 야마토왜(大和倭)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혈통이 지금껏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이어진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실제로 2680년 전인 서기 전 660년 2월 11일 건국했다고 믿는 일본인은, 극소수의 극우파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문헌사료는 물론 유적·유물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야마토왜는 이르면 서기 3세기 말 경 가야계가 큐슈지역에 ‘진출’하면서 시작한다. 가야계가 ‘정복’한 것이 아니라 ‘진출’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열도에는 철갑으로 무장한 가야계의 진출을 저지할 정치세력 자체가 없었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 2월 11일을 ‘건국기념의 날’로 제정한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건국기사를 서기로 환산한 것이다.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분석하기 전에 역사서의 형태를 크게 나누면 기전체(紀傳體) 사서와 편년체(編年體) 사서의 두 종류가 있다. 기전체 사서는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황제들의 사적인 기(紀)를 중심에 배치하고,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 신하들의 사적인 열전(列傳)과 각종 연표인 표(表)와 각종 전문 분야에 대한 기록인 서(書)로 나누어 서술하는 방식이다. 기전체는 황제들의 사적인 기(紀:벼리)가 중심이 되는데, 벼리는 모든 일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라는 뜻이다.

 

편년체는 시간순으로 서술한 사서이다. ‘일본서기(紀)’는 황제의 사적이라는 의미의 기(紀)자를 붙였으니 기전체를 표방한 사서다. 그러나 기전체 사서가 갖추어야 할 세가, 열전, 표, 서 등이 일체 없이 임금들의 사적만 연대순으로 서술했으니 사실상 편년체 사서다.

 

 

 

연대조차 거짓으로 기록한 ‘일본서기’

 

기전체와 편년체를 막론하고 모든 사서의 기초는 연대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문제는 일부 연대를 실수로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먹고 연대를 조작했다. ‘일본서기’는 신들의 역사인 신대(神代)로 시작해 신대 상하(上下)를 서술한 다음 제1세 신무(神武)가 등장한다. 신무가 즉위한 해를 서기전 660년이라고 보는 것을 황기(皇紀) 또는 신무기원(神武紀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신무 기〉에 “신유년(辛酉年) 춘 정월 병진(丙辰) 초하루에 천황이 가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했다. 이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신유년을 서력(西曆)으로 환산해보니 서기전 660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전 660년 신무가 즉위했다고 결정한 해는 메이지 5년(1872)였다. 지금의 총리격인 태정관(太政官)은 그때까지 사용하던 태음태양력을 태양력으로 바꾸면서 메이지가 즉위한 날을 2월 11일이라고 결정해 ‘건국기념의 날’로 기념했다.

 

쓰가모토 아키가타(塚本明毅:1833~1885)라는 역학자의 해석을 따라 2월 11일로 결정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날이 되면 각급 학교는 교장 이하 전 직원·학생들이 일왕 부부의 사진을 모셔놓고 일왕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낭독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쳐야 했다. 이른바 황국사관(皇國史觀)의 뿌리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날이었다. 그런데 패전 후인 1947년에도 가타야마 테쯔(片山哲) 내각에서 이날을 ‘건국의 날’로 헌법에 삽입하려다가 연합국 최고사령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가타야마는 일본사회당 위원장을 역임한 좌파계열 인물인데도 이날을 ‘건국의 날’로 헌법에 넣으려고 했으니 우익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미 군정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나자 1952년부터 건국기념의 날 부활운동을 일으켰고, 급기야 1966년 “건국을 기념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른다”는 취지로 ‘건국기념의 날’이 다시 국가공휴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 조작한 허황된 건국연대

 

‘일본서기’에 따라 신무가 신유년에 즉위했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이를 ‘신유혁명’이라고 높이고 있다. 그런데 중국 원(元)나라 때인 1345년 편찬한 ‘송사(宋史)’ 〈외국열전〉 일본국 조에는 “신무천황이 축자(築紫)에서 대화(大和)에 들어가 가시하라궁에서 산 것은 갑인년인데, 주(周)나라 희왕(僖王) 때에 해당한다”라고, 신유년이 아니라 갑인년에 즉위했다고 달리 말하고 있다. 갑인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전 667년으로 ‘일본서기’보다 7년이 빠르다.

 

더 큰 문제는 서기전 660년이고 667년이고 일왕 신무가 즉위했다는 주장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점이다. 서기전 7세기에 일본 열도에는 나라로 부를 정치세력 자체가 없었다. 일본 고대사는 조몬(繩文:승문)시대부터 시작하는데 대략 서기전 8000~7000여 년 전부터 서기전 400~300년경까지를 말한다. 이때 새끼줄무늬 모양의 토기가 나오기 때문에 ‘새끼줄 승(繩)’자를 써서 승문(繩文:조몬)문화라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야요이(彌生)문화는 대략 서기전 400~300년 경부터 서기 3세기까지 약 600~700여년 간의 문화를 뜻한다. 메이지 17년(1884) 도쿄 분쿄구(文京區) 야요이마치(彌生町)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토기라고 부른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야요이문화는 논에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짓는 수도작(水稻作) 농경을 실시하는데, 철기와 청동기를 사용하고 실을 뽑아서 천을 짜는 방직(紡織)이 행해졌다. 일본학계는 이를 “중국과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새로운 요소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중국은 새로운 문명을 고대 한국인들이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끼워 넣은 것이고 사실은 모두 고대 한국인들이 가져간 것이다. 즉 야요이문화는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시작된 것이다. 서기전 400~300년 경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가 시작되는데, 서기전 660년 경에 신무가 임금으로 즉위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 지금 기념하고 있는 ‘건국기념의 날’이라는 것 자체가 조작된 역사이다.

 

‘일본서기’를 읽는 법

 

그러면 ‘일본서기’는 왜 이런 허황된 내용을 수록했을까? 이는 ‘일본서기’라는 역사서의 성격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일본서기’는 건국연대뿐만 아니라 야마토왜와 신라·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관계도 거꾸로 썼다. 특히 백제는 황제국이고 야마토왜는 제후국인데, 야마토왜를 황제국으로 그리고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꾸로 묘사했다. 이 역시 백제와 야마토왜의 관계를 알아야 풀리는 문제다.

 

중국의 ‘양서(梁書)’ 〈동이열전〉에는 “백제는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고 하고 읍을 담로(檐魯)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군현(郡縣)과 같다. 백제에는 모두 스물 두 개의 담로가 있는데, 대개 왕의 제제와 동족들이 나누어 웅거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을 보면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이라고 썼다. 이를 김부식은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으로 낮추어 기술했다. 백제에서 일왕에게 내려준 유명한 칠지도(七支刀)에는 “마땅히 후왕에게 공급할 만하다(宜供供侯王)”라고 쓰고 있다. 야마토왜는 백제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다. 야마토왜는 ‘양서’에서 말하는 백제의 담로, 곧 제후국 중 하나였다.

 

이런 관계를 거꾸로 써놓은 역사서가 ‘일본서기’인데, 720년에 편찬했다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서기 660년 백제 수도가 함락되자 당황한 야마토왜는 큐슈 북부의 태재부(太宰府)를 전시 수도로 삼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선박을 건조했다. 3년간 군사를 기른 야마토왜는 지금의 대한해협을 건너와 백제부흥군의 지휘를 받아 백강(白江:백촌강) 하구에서 신당(新唐:신라·당)연합군과 격돌했다. 이 국제해전은 한국의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서기’와 중국의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에도 모두 기록된 큰 사건이었다.

 

663년 벌어진 백강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2만7천여 명의 군사와 4백여 척의 전선을 잃는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한 것이다. 그 57년 후에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모국이자 상국인 백제가 무너졌으니 야마토왜 자력으로 생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서 황제국 백제를 제후국으로 서술하고 제후국인 야마토왜를 황제국으로 서술하면서 독립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러면서 개국연대를 1천년 이상 소급해 660여년 경에 야마토왕조가 시작한 것으로 설정했다. 그러니 연대부터 맞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100명이 연구하면 학설이 100개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한국에서 국고로 편찬한 ‘역주 일본서기’는 “(일본서기의)진정한 가치는 ‘일본서기’가 고대인들에 의해서 편찬된 고대의 사서라는 점에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즉 중세인의 시각에서 본 역사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더 가치가 높다고 호도하고 있다.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의 지석은 무령왕이 523년 5월 7일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해 ‘삼국사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강단사학은 거꾸로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면서 369년 야마토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허황된 기사가 사실인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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