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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희의 향기로운 술 이야기] 입으로 빚은 술, 사람이 남긴 가장 오래된 기억

 

조선 세조 8년, 지금으로부터 약 560년 전. 유구국(오늘날의 오키나와)에서 온 사신이 조선 왕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의 나라에서는 열다섯 살 처녀들이 쌀을 씹어 뱉어 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인류가 술을 만들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다.

 

우리 고서 '지봉유설'에도 비슷한 술이 등장한다. ‘미인주(美人酒)’라 불리는 이 술은 젊은 처녀들이 달빛 아래 춤을 추며 쌀을 씹어 빚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처럼 들리지만, 이 낯선 풍경은 인간의 직관적 과학과 공동체 문화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소통하며 생존의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방식의 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밥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 침 속 아밀레이스 효소가 쌀의 전분을 당으로 바꿔 단맛을 낸다. 이걸 모아두면 공기 중 효모가 발효를 일으켜 술이 된다. 누룩도, 기계도 필요 없는, 오직 사람의 입과 자연의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기적이었다.

 

이런 술을 우리는 ‘구작주(口嚼酒)’라 부른다. 말 그대로 ‘입으로 씹어 만든 술’이다. 잉카 제국에는 ‘치차 데 무코(Chicha de muko)’라는 술이 있었다. 선발된 여성들이 옥수수를 씹어 신에게 바치는 술을 빚었다. 일본에는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가 있었고,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 술이 기억과 시간을 잇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방식의 술이 서로 전혀 다른 문명권에서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언어도, 문화도 달랐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술의 원리를 이해했고, 그것을 제의와 공동체의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축적한 생존의 기술이자 감성의 문화였다.

 

오늘날 우리는 효율적이고 위생적인 양조 방식을 사용한다. 술은 공장에서 생산되고, 신과 조상을 위한 제의보다는 상업적 소비가 우선된다. 구작주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이 오래된 술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붙든다. 누군가는 손과 입, 정성과 믿음을 다해 무언가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고, 그 속에는 단순한 취기가 아닌 삶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술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염원과 추억이 스며든 따뜻한 한 방울, 그것이 바로 술 아닐까. 구작주는 기술 이전의 감각, 기억 이전의 직관이 빚은 술이다.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그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오래된 술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셈이다. 구작주가 품고 있는 ‘정성과 진심’의 가치는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잃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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