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통창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다. 책을 떨군 것도 모른 채 한 시간 넘도록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창 너머 하늘을 찌르고 선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 사이에 걸린 구름일까, 나무들 뒤 주차장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일까. 소년의 시선을 이끈 것은 마음, 영혼, 무의식같은 그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날, 그가 점령했던 왕국의 일용할 양식이던 것들. 웃음소리와 고집과 도발로 융성했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찬탈한 이는 누구였을까. 소년은 최근 자퇴한 고교 2년생이었던 내 아들이다. ‘멍 때리고 있던 아들’ 그 아들의 뒷모습에 감동해 ‘멍 때리고 있던 나’, 모자(母子)의 생경한 모습은 어제 헤이리 내 작업실에서의 실황이고. 입시지옥에 영육이 말라가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의 권유가 시작이었고 아들의 빠른 수용으로 일사천리 결정된 자퇴 후, 한 달이 지났다. 아들은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고, 말이 많아졌고, 없었던 애교(?)까지 부린다. 숙제와 시험에서 해방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아들 뒤에서 난데없이(물론 동의했지만) 그의 삼시세끼 해결이라는 숙제와 시험을 받은 나는......소리도 못내는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키우며 한숨과 함께 튀
사람들은 ‘조선의 잔다르크’라 불렀다. 45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무정 장군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종로거리로 행군해 들어오던 날 ‘백마탄 여장군’이 왔다며 환영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뺀 모든 사람들이 통일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설파하던 장군은 48년 10월, 해방된 조국의 부평경찰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조선의용군 지휘관 김명시의 이야기다. 1907년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 장군은 일찍이 오빠 김형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유학을 마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해 19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선 장군은 1932년 국내잠입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오빠 김형선은 서대문형무소, 동생 김형윤은 부산형무소로 삼남매가 모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장군은 즉시 중국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휘하에 20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싸웠다. 해방 이후 46년 3월 시인 노천명이 김명시 장군을 인터뷰하고 서울신문에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半生記)”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난 21일 ‘수원 세 모녀 사건’이 발생했다. 정치권, 행정부 곳곳에서 ‘특단 조치’를 말한다. 공동체주의와 연대가 대안이란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과 괴리가 있다. 두 가지 경우를 보자. 먼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년 장애인현황 통계’의 등록장애인은 263만3000명이다. 전체 인구 대비 5%대다. 실제 장애인 수는 더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장애인이라는’ 낙인, 수치심 등은 등록과 신고를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 ‘된장녀’, ‘된장남’(의존적 과소비자, 혹은 여성과 남성을 비하하는 신조어)이라는 단어엔 ‘불편한 진실’이 함의돼 있다. 어쩌면 된장녀, 된장남은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행태일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정신질환과 장애를 숨기는 문화가 있다. 장애인 등록과 정신과 치료를 터부시하기도 한다. 등록과 신고를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과 2022년의 ‘수원 세 모녀 사건’은 무등록, 무신고가 공통점이다. ‘송파 사건’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긴급복지법 등이 개정됐다. 사회보장 정보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지자체별로 ‘찾동(찾아가는 동주민센터)’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무
“이 감정은 뿌듯함입니다.” 6/29일부터 16회를 달려 8/18일 막 내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마지막 대사다. 로펌 한바다의 정규직이 된 우영우는 뿌듯하다. 우영우를 연기한 박은빈도 뿌듯하다. 완벽히 톱스타 반열에 올랐기에. 제작사인 에이스토리는 우영우 IP로 웹툰을 출시하였고 뮤지컬도 계약했다. 우영우 방송 전 6/23일 종가 기준 16,250 원하던 주가가 7/19일 32,800원이 되었다. 한 달 만에 시가총액이 두배 되었다. 안 뿌듯하면 그게 이상하지. 투자를 결정한 스튜디오 지니의 김철연 대표와 채널 ENA의 윤용필 대표도 뿌듯하다. 올 4월 ENA리브랜딩 미디어데이 때 향후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한 드라마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다. 이름도 생소한 채널명을 TVN에 버금가게 만든 공은 윤용필 대표와 우영 우에게 있다. 이들의 뿌듯함 대신 시청자는 따듯함을 느꼈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를 보면서 응원하고 인간승리에 박수를 쳤다면 우영우에서는 따듯한 마음으로 공감하고 힐링을 느꼈다. 우영우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가는지,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함께 성장하는지를 보여주었
국민대가 이미 심각한 표절 사실이 드러난 김건희 박사논문에 대한 시민사회의 검증 요구를 최종 거부했다. 숱한 허위 경력과 표절로 얼룩진 그녀는 논문 제목에 ‘멤버 yuji’라는 우스꽝스런 표현이 나올 정도로 어설픈 내용에 남의 논문과 블로그를 그대로 베낀 흔적들이 너무 많아 이미 국민들과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쯤 되면 대학이 논문을 취소하고 대학 본부가 공식 사과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달 초 국민대는 “논문 작성의 진실성을 의심할 만한 심각한 표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대학 교수회가 표절 여부의 심사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절차인가? 연구 진실성 여부는 즉시 검증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마저 부결되어 교수회는 망신을 자초했다. 대학은 언론, 건전한 야당과 함께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는 3대 축의 하나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시대에는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작동해야 봉건과 전제가 발을 못 붙인다. 그런데 그 한 축인 대학이 이 정도로 타락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진실의 토대 위에서 존재하는데, 진실을 지키려는 대학인의 기본 윤리가 눈에 안띈다. 상대가 최고 권력자
폭력이란 무지하고 야만적인 자가 민중들에게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작동을 중지하면 그 효과도 중지된다. 반대로 설득은 마치 강물이 우리의 관심이나 노력 없이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기울어져 있는 강바닥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지도하는 방법에 단 두 가지밖에 없다. 그 하나는 인간에게 그 사람의 성향과 판단과는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향을 다스리며 이치로 설득하는 방법이다. 하나는 무지하고 야만적인 방법이므로 그 결과는 환멸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경험이 증명해 주는바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이다. (콩브) 폭력은 그릇된 정의를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을 폭력 없이 바르게 살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주적(主敵)이라고 일컫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과 같다. (조헌정)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이라는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임과 동시에 또 다른 제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 분단이 일어난 날이다. 현재 북쪽에는 소련군이 없지만, 남쪽에는 남한 군대를 통제하고 지휘하는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어 온전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공식적으로 1905년 통감부 설치에서 시작해 1945년까지 무려 35년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1880년 무렵부터 조선을 침략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반세기 이상 조선의 식민 착취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일본은 정보통제부터 실행했다. 조선인들이 말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해야 저항이 쉽게 일어나지 않고 손쉽게 조선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1907년에는 신문지법, 1909년에는 출판법을 만들어 두고 조선어 민간신문과 잡지를 사건검열 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조선어 민간신문이 일제 검열에 어떻게 투항하려 했는가를 연구한 이민주(2018)의 연구를 보면, 조선어 신문에 내려졌던 행정처분에는 주의, 삭제, 차압(압수), 발행정지, 발행금지가 있었다. 1930년 ‘조선에 있어서의 출판물개요’를 토대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두 신문에 내려진 1926년이후 1929년의 압수처분 월별 건수를 살펴보면 시기별로 차이는 있지만 매달 1~3건, 많게는 10건에 이르기까지 압수를 당했고, 발행정지 기간을 제외하면 압수가 없는 달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조선어 민간신문이 삭제나 압수를…
1. 불세출의 평론가 김현 제자 중에 정과리가 있다. 정 교수가 사십 초입일 때, 스승에게 요즘 논어를 읽고 있노라고 말했다. 김현은 그래? 하면서 말꼬리를 올렸는데, 눈치 없는 제자는 이어 말했다.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없었어요. 내가 이 에피소드를 읽은 건 서른 초반이었다. 논어를 읽으면서 무척 행복하다는 제자의 진술에 스승인 김현이 마뜩잖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공자님 말씀을 읽으면서 세상 행복하다는 말이 기껍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도록 께름한 게 남았다. 사십 중반에 들어 스승 밑에서 논어를 읽으면서 비로소 정 교수의 행복을 공감했다. 옳게 된 선생님 지도 아래 읽는 논어 말씀은 그 자체로 천국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이란 일점일획도 틀림없어서, 읽는 도중에 자꾸 눈물이 났다. 하근기인 내가 공부자 말씀대로 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바로 태평성대로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논어를 읽고, 대학과 중용도 읽고, 노장에 주역도 얼추 떠들어 보았지만, 성현의 말씀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20대 초반에 알게 모르게 맑시즘 세례를 받았던 세대로 불의한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을 통한 만민 평등을
윤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큰 기대는 안했지만 어려운 국내 정국을 감안할 때 나름 획기적인 대북정책 관련 대북제의로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대를 했었다. 식량지원을 포함 발전, 항만, 농업기술, 의료, 국제투자 금융지원 프로그램 등 그간 북한에게 제의했고 또한 북한이 원하는 모든 내용이 포함된 그야말로 ‘담대한 구상’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조건이다.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면’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참 답답한 것이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한 것은 ‘90년대 초 핵문제가 대두된 후 수 십 차례는 될 것이다. 보수진영에서는 계속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해 왔으나 지난 2018년 판문점, 평양남북정상회담과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그들의 진성성을 확실하게 확인한바 있다. 남한의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국민 앞에서 직접, 자유롭게 연설을 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담대한 구상‘을 얘기 하니 북한이 발끈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현 정부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북한관련 문제를 정쟁화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8월의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광복 77주년을 맞이하는 열기만 하겠는가.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나누는 각종 기념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렸다. 해방이 가져온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에게 해방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기념해야 하지. 기념행사에서 대통령은 ‘담대한 구상’을 제시했다. 핵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한 북쪽의 반발은 거세다. 쏟아내는 막말은 거칠고 수위를 넘는다. 분단이 가져온 불신과 몰이해는 지켜보는 사람조차 숨가쁘게 한다. 유일하게 남북은 8월15일을 해방의 날로 인식하고 기념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정책 구상도 이날 제시한다. 남쪽에는 해방과 분단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각종 기념행사가 많다. 기억하건데 북쪽에서의 8월 15일은 남쪽에서 열리는 행사만큼 요란하지 않다. 북쪽은 1995년부터 8월 25일을 선군절로 기념한다. 8월 25일은 선군정치 시작을 기념하는 국가적 명절이자 휴일이다. 그 시기 나는 고향을 떠났고 북쪽에서는 군(軍)을 우선하는 정치를 했다. 이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그렇게 국경을 넘은 사람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