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대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무력화한 이른바 윤석열 사태 정국이 아닌가 한다. 당시 검찰의 선택적 수사에 분노한 시민들은 대규모 촛불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0대는 생뚱맞게도 공정을 외쳤다. 조국 씨 부부의 자녀 스펙 쌓기야말로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증표라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기성 언론이 정권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낯선 언어인 공정을 내세웠는데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 격으로 예기치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무튼 20대가 부르짖은 공정은 한국 사회의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공정이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어 20대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는 이즈음이다. 하지만 이는 20대의 출현 그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공정 사건' 이후부터 그들이 선거의 가장 큰 변수로 자리 잡아 기성세대의 판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대 대선 후보 지지율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20대 존재감으로 정리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헤럴드경제 의뢰로 지난 2~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20대의 국민의힘당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53.7%로 과반을 넘었다. 리서치뷰가
레퀴엠(Requiem).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그래서일까. 무섭고 장중하고 근엄하다. 하지만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레퀴엠은 전혀 다르다. 지옥불처럼 요동을 치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아주 상냥하고 평화롭다. 죽음은 결코 황망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포레의 철학이다. 그의 파반느(Pavane) 역시 너무도 아름답다. 피아노 선율과 트럼펫 소리는 우리의 심연을 오묘하게 파고들어 흔든다. 독일풍이 아닌 프랑스풍을 구가했던 포레. 키는 작았지만 뚝심의 사나이였다. 그의 고집은 프랑스 음악을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탈피시켰다. 그가 격찬 받는 이유 중 하나다. 포레는 베를리오즈 시대가 가고 드뷔시의 시대가 오기 전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건 아니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비평가들은 흔들어댔다. 그러나 포레를 괴롭힌 건 혹평이 아니라 신체적 장애였다. 귀머거리 작곡가하면 베토벤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포레 역시 그러했다. 선율을 들을 수 없다면 작곡가의 인생은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역경 속에서 더 찬란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레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청각을 잃으면서부터…
영혼에 있어서의 선은 육체에 있어서의 건강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진실로 몸에 배어 있을 때 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진실로 선한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 선한 사람인 것이다.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선행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짜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선행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자기 이름도 알리지 않는다. 반면 거짓된 선행은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이름을 알린다. 진정한 공정함은 필요한 경우에만 얼굴을 내놓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거짓된 공정함은 늘 참견하고 나서기를 좋아한다. 진정한 예의는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만 특별히 자기를 과시하고,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폭력을 써서라도 자신의 규칙을 지키게 한다. 바른 도리가 쇠퇴하고 인의가 사라지면 예의가 나타난다. 그 예의의 법칙은 정의의 모조품이며 모든 무질서의 시초에 불과하다. (노자)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끝까지 저 똑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애쓴다. 길을 반쯤 가다가 기운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중국 금언) 남몰래 선행을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그때 비로소 너는 선행을 하는
어떠한 이치도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귀속시킬 수는 없으며, 정신의 탄생을 물질로 설명할 수도 없다. 영혼의 실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일에 열중하여 자유와 정의와 사랑 같은 정신적인 것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이성의 빛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사람으로, 빛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며, 반대로 죽은 사람이 빛을 받으면 마르고 썩기만 하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르게 변화시킨다. 영적 생명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주의를 돌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점검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생활을 고결한 영적 요구에 합당하도록, 즉 자유롭고 올바르고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고, 실천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선의 여러 목적에 가장 합당한 사상과 감정으로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사람은 진실을 찾아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왜냐하면 영적 생활은, 눈에 보이는 외계의 생활이 태양의 빛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이성의 빛이 없이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카) 형이상학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학문으로는 아닐지라도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던진 ‘선제타격론’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배치’ 공약이 논란을 빚고 있네요. 윤 후보의 입에서 ‘선제타격’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민주당이 발끈하는군요. ‘전쟁광’이라는 과격한 말까지 나왔어요. 사실 ‘선제타격론’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공격 징후가 현저할 경우”를 상정한 질문에 대한 즉석 답변인데, ‘억까’식 비난은 좀 과하다는 느낌이 있네요. 그런데 지난 3일 TV 토론회에서 윤 후보가 한 ‘사드 추가배치’ 발언은 엉성하기 짝이 없어요. 북한의 핵미사일로부터 수도권 방어를 위해서 다양한 요격미사일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얘기라면 비난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하필이면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드’를 수도권 주변에 배치하겠다니 벌집을 건드린 셈이 되고 말았군요. 문득 윤 후보 참모들의 수준을 의심케 되네요.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우선 ‘선제타격론’은 북한군의 ‘발사징후’를 포착하기가 어렵다는 차원에서 미더운 대안이 못 된다고 해요.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정치적 허세나 꾐수는 될지언정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라는 얘기죠. 윤 후보의 ‘사드 추가배치’ 공약도 그래요. 실효성은 물론이고 선거전략 상으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가 쏟아지고 있지만, 누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역대 대선을 보면 대선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유력 후보들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는 현상은 있었어도, 이번 대선처럼 1위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거대 정당의 후보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 창출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들이 거시적인 이미지를 창출했었다.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샐러리맨 신화를 내세워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었었고,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연관된 이미지를 창출했었다. 19대 대선의 경우 탄핵 때문에 급하게 치러진 대선이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 창출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통상적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이기 때문에 후보의 이미지 창출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두 후보 모두 이런 이미지 창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거시적 슬로
초등학교 생활에서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학업보다는 친구 관계가 더 크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초등학교는 친구와 사이가 좋으면 만사형통인 아이들이 많다. 학부모 상담을 했을 때 부모님의 걱정도 교우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게 친구가 없으면 아이 본인도, 부모님도 걱정이 크다. 인간관계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게 아니기에 친구 사귀는 법이라는 정답이 있는 메뉴얼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히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들은 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걸 어려워하는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상담에서 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아이는 상담 후에 정말 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고, 또 다른 아이는 노력했지만 끝내 혼자인 채로 다음 학년에 올라갔다. 아이 노력과 부모님의 관심 및 협조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성공 확률이 더 높다. 교우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첫 번째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글자만 놓고 보면 얼핏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아니다. 대체로 아이들은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절대자의 섭리에 순응해야겠지 싶다. 운명이란 두 글자가 품고 있는 그 의미 속으로 푹 빠져들어 허둥대다 끝나는 것이 인생인가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며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온몸으로 걸었다. 기초적인 생활경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때때로 하늘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지족자선경(知足者仙境)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살았다. 매사에 족한 줄 알고 나와의 인연에 감사하며 상대를 배려하고자 했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신의 빛과 스타일을 위해 나 자신답게 살고자 했다. 그런데 진(眞)과 선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때 영혼이 감전되어 죽어 가는가 싶기도 했다. 몇 년 전 이청준의 산문집에서 『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글을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전쟁의 어느 해 겨울, 외국 선교사가 눈 덮인 시골길 다릿목을 지나가는데 교각 아래에서 웬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려가 보니 한 남루한 여인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어있는데 그의 품속에는 갓 태어난 여자아이가 아직 살아 울어대고 있었다. 심한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아이가 살아남은 것은 그 엄마가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를 꼭꼭 감싸 안고 죽었기…
지난 2·1은 남한과 북한 주민 모두에게 민속명절인 설날이었다. 새해에 주고받는 덕담 중에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말고 귀를 열고 진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임인년 새해에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2018년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를 카드로 대북 제재 해소를 목표로 정하고 저돌적으로 남한과 미국을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2017년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 15형 발사 이후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및 국제무대에 나와 1년 동안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 미북정상회담, 다섯 차례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한차례 북러회담 등 속도감있는 대화 공세를 편 바가 있다. 하지만 ‘하나를 주고 열을 얻겠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성과 도출에 대한 조급함으로 북미협상은 교착되었고, 그 결과 북한은 인민생활 풍요 대신 제2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고 미국과의 장기적인 대결하에서 자력갱생의 정면돌파전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2022년 1월에 김 위원장은 또다시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달 사이에 유엔 안보리
1960년 9월 26일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TV토론이 개최되었다. 미국 인구의 3분의 1인 7000만 명이 시청하였다. 공화당의 닉슨 후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 8년을 한 최고의 정치인이었고 민주당 후보는 40대의 무명 신인인 케네디였다. 연설에 자신이 있었던 닉슨은 아무런 예행연습도 없이 회색빛의 양복으로 출전하였고, 야심에 찬 케네디는 옅은 화장에 눈에 잘 띄는 짙은 색의 양복을 입고 나섰다. 케네디의 도발적인 질문에 논리적인 대응으로 시종일관 받아넘기는 닉슨은 왠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반면 케네디는 건강한 구릿빛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만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TV토론은 4차례 더 진행되었고 미국인들의 선택은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였다. TV토론을 통해 미국인은 베일에 가렸던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20대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이 지난주 시작되었다. 누구는 밋밋했다, 장학퀴즈 같았다는 냉랭한 평가도 있지만 날 선 공격과 어설픈 방어 그리고 논리적 주장과 억지 주장 등 시청률 39%에 이를 만큼 관심이 집중되었다. 물론 TV토론을 보고 후보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