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함이 없는 자기완성은 불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데 더이상 무엇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건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명예 속에 있지만 인생의 수수께끼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된다. 너무 어려운 것, 자신의 역량 이상의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진지하게 고찰하라.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 지금도 그대 앞에는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견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있지 않은 지식을 자랑하지 마라. (전도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모욕을 당하고도 보복하지 않고 평온하게 그것을 참아 넘길 수
교육의 기초는 만유의 본원에 대한 관계를 수립하고, 그 관계에서 생기는 행동의 규범을 수립하는 일이다. 아동 교육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아동은 그저 인류의 현재 상태에 맞춰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상태,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생활조건에 맞춰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부모들은 현재의 세상에만 맞춰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아동을 미래의 더 나은 세상에 맞춰 교육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인류의 미래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 (칸트) 아이들에게 자기 내부의 신성을 자각시키는 일이야말로 그 부모와 교육자들의 가장 큰 의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채닝)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다. 결백하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결백과 정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정의에 어긋남이 없을 뿐만 아닐, 정의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존 러스킨) 종교는 교육의 기초이다. 그런데도 현대 기독교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는 예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들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들까지 신용하지 않는다. 마음이 갈
이번 대선에서 눈에 띄게 좋아진 점이 있다. 색깔론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캠페인도 확연히 퇴색되고 있다. 이 자리를 ‘젠더 이슈’나 ‘세대 갈등 문제’가 끼어들 기미는 있다. 선거 때만큼은 국민이 왕임을 실감한다. 응축됐던 민의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선거 진영은 이를 수렴해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을 내놓는다. 국가적 난제도 여론의 힘으로 해결되는 계기가 된다. 대통령 선거 후 6개월은 언론도 승리한 후보의 정책에 비판의 칼날을 유보한다.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다. 특정 집단은 표의 응집력을 발휘할 때 그 힘은 배가 된다. 투표율까지 높으면 그 힘은 태풍이 된다. 이번 대선에서 2030 유권자가 그 지위를 확보했다. 지난해 4월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보여준 이 세대의 위력적인 표심 때문이다. 이념이나 지역정서에 매몰되지 않은 이들의 선택은 초미의 관심사다. 이 세대만을 대상으로하는 여론조사까지 나오고 있다.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대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세대 갈등’이 아닌 ‘세대 여론’이 옳다. 안도하던 선거판에 난데없는 ‘멸공’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것도 정치적 언사를 극도로 조심하는 국내 기업풍토에서 정용
어머니께서 7년째 병원신세를 지며 힘들게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1935년생 88세, 미수(米壽)시다. 아들과 마지막 통화하시고 한 시간 뒤에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이틀 전 병원측의 협조로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행운이었다. 임종의 도리도 지키기 힘든 시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빠르고 현저하게 어머니의 체력이 약화되었다. 어머니는 마침내 혼자서 걸을 수 없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짧은 거리나마 어렵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화장실 출입이 고난도 프로젝트가 되었다. 최근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식사나 자잘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능이 전반적으로 제로로 향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구급차를 불러야할 응급상황이 빈발했다. 특히 승하차 과정이 정말 위태로웠다. 그 길고 험난한 시간을 동생이 24시간 보초병처럼 어머니를 보살폈다. 큰 상금이나 무공훈장을 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명을 자발적으로 감수한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그 특별한 보살핌이 자발적이지 않다면 이는 단지 억울한 희생이고 노예 노동일뿐이다. 이 미담을 세상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
원장님 저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다. 워낙에 개원초부터 불편한 증상이 있으면 한의원에 가장 먼저 내원해 치료를 받는 그녀는 협심증이 있고 고혈압으로 양약을 복용 중이다, 오늘 신경을 좀 썼더니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하며 소화가 안되어 들렀다 한다, 지난 8월 말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후에 가슴통증, 소화불량을 비롯한 허리와 무릎통증 등 증상이 심해지면서 아프고 힘들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서 내원했었는데 그때 침 치료받고 한약복용하고 해서 덕분에 다시 일을 하러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다만 아직도 가슴이 답답한 증상은 남아 있는데 치료받을 시간이 없어서 내원하지 못했는데 오늘 백신 부스터샷 접종을 하러 가려다가 지난번에 나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몸의 면역을 먼저 챙겨야겠다는 싶어 내원했다 한다. 2022년 1월 한의원의 풍경이다. 원래의 치료에 더해서 지난해 여름부터는 전신 또는 몸의 여러 부위의 통증, 저림, 무기력, 마비 등등 다양한 백신접종 후 이상반응들을 마주하고 치료한다. 한의약을 적용하는 나라들의 풍경이 다양하다. 대략 90%에 가까운 양의사들이 한약을 직접 처방할 정도로 한약에 대한 선호도·신뢰도가 높은 일본에서 공개된 ‘키타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선의로써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아무리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의 내부에도,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그래,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우리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둘째로 그들을 결사적인 싸움으로 유인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서로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현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좀 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선의로 대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악의 유혹에 빠진 사람을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남에게 위로받은 적이 있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어요. 교통법규를 제멋대로 무시할 때 말이지요. 그렇다고 멱살다툼을 할 순 없잖아요. 무시하는 그도, 지켜보는 우리도, ‘어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으니까요. 화가 나서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도 있긴 했어요. 바쁜 일이 있거나 성마른 성격 탓이었겠지요.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어요. 다른 차로와는 달리 오른쪽 바깥 차로만 꽉 막혀 있었으니까요. 사고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앞서가던 차들이 차로를 변경하며 추월하기 시작했어요. 급할 것이 없는 우리는 차로를 고수했지요.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가는 중이었거든요. 대여섯 대의 앞차가 추월해서 나간 뒤에야 문제의 트럭이 꽁무니를 드러냈어요. 짐칸에 채소를 가득 실은 1톤 트럭이었어요. 사고가 있었거나 고장이 난 것 같진 않았어요. 비상등을 깜빡이며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느려도 너무 느리다는데 있었어요. 걸어가도 그것보다 느릴 순 없었으니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을 즈음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비상등을 켜고 기어가는 트럭 앞에는 허리 꾸부러진 할머니가 있었어요.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였어요. 할머니의 손수레에는 차곡차곡 쌓은 빈 박스가 한 짐이었어요.
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마더/ 안드로이드’에는 ‘KOREA’가 두 번 언급된다.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피해 살아 남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려는 주인공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겠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극 후반에 이들은 실제로 한국으로 가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를 낳은 여주인공 G(조지아, 클로이 모레츠)는 두 다리를 잃은 아이의 아빠 샘(알지 스미스)과 함께 한국에서 온 요원 셋을 만나 갓 낳은 아이를 눈물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다. 특히 뒷 장면은 6·25 전쟁 후 숱한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상한 데자뷔를 준다. 이제는 미국인들이 전쟁보다 더한 전쟁을 겪으면서 아이를 거꾸로 한국으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AI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반란은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한국 쪽에서 나온 여성 두 명, 남성 한 명의 복장과 스타일인데 이들 모습이 남한보다는 북한 사람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디테일이 조금 떨어진다는 감을 준다. 그들에게는 남과 북이, 남한 사람
- 난데없는 ‘멸공놀이’를 한 자들 신세계의 정용진, 검찰총장 출신 야권 후보 윤석열, 정치인 나경원 그리고 여기에 판사와 감사원장을 지낸 최재형까지 가세해서 최근 SNS에서 차례로 난데없는 “멸공(滅共)” 놀이를 해 대중의 흥밋거리용 주목을 받았다. 사안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부여해준 다소 희극적인 기회였을 뿐이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멸치, 콩에다가 ‘멸공’과 ‘자유’라는 단어였다. 보통 시민들이 이랬다면 당연히 “뭐야, 애들 장난해? 돌았나?”할 법한 일이었다. 이런 시시껍적한 것까지 기사화하는 언론 또한 경멸을 당했을 것이다. 3류 황색신문이 되는 꼴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이들 네 사람은 아직도 빨갱이 잡기에 광분했던 매카시즘의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이념적 크레마뇽인” 상태다. 이게 이 나라 특권동맹세력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세계의 단면이다. 시대의 변화와 미래 궤도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게 망가져 있다. 뇌가 총을 맞았다. 대단한 사회적 메시지인양 자신들의 SNS 놀이를 장면 연출용 미장센(mise en scene)처럼 도구까지 등장시켜 암시적으로 유포하는 듯 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해진…
‘한 순간, 생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눈빛’이란 말을 이해한 것은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감독: 노먼 주이슨)’에서 신부 아버지로 분한 차임 토폴을 통해서다. 신기하고 존귀한 선물이면서 애간장을 끓게 하는 십자가, 자식이란 존재를 통해 겪은 희노애락애오욕의 길고 긴 세월을 단 몇 초로 표현해냈다. 명배우의 눈빛만이었을까. 그 눈빛을 더 빛나게 했던 것은 결혼식 장면 내내 흐르던 노래였다.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 그 노래는 사춘기 때 라디오 심야방송을 통해 처음 들었고 자주 들었다. 카카오 함량 높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기보다 쓰고 음울했던 멜로디에 콧날 시큰했던 기억도 나는데 사춘기의 감상만은 아니었다. 작사가 셀든 하닉은 처음 노랫말을 쓴 후 작곡가 제리 복의 부인에게 보여주었는데 부인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작사가의 누이 역시 노랫말을 보고 울었다. 이 소녀가 내가 키운 그 아이인가/ 이 소년이 놀고 있던 그 아이인가/이 아이들이 커가는 걸 기억 못하겠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언제 그 소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나/ 언제 그 소년이 저렇게 키가 컸나 /저 애들이 작았던 때가 어제가 아니었나 / 해가 뜨고 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