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를 실시했다. 그리고 무과에서 무려 2천여명을 합격시켰다. 정조는 이중 500명을 선발,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고 왕의 호위를 맡게 했다. 그리고 8년 뒤 1793년 화성건설계획을 추진하며 이름을 장용영(壯勇營)으로 개칭한 뒤 도성 이외에 수원에 외영을 설치했다. 도성을 비롯 외영에 주둔했던 군사 수만도 4천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사들은 수시로 진법을 익히고 단위로 활쏘기와 조총사격, 창검무예인 24기(技)를 연마했다. 이들 군사 중 전투력이 뛰어난 기병부대 ‘선기대(善騎隊)’와 친군위(親軍衛)에는 별도의 특수훈련을 추가시켰다. 특히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던 장용영 내부 무예 시험에 정조가 직접 참여하면서까지 기병 전투력 강화에 신경을 썼다. 도성을 방어하는게 선기대의 임무였다면 친군위는 수원에 설치된 장용외영에 주둔하면서 화성의 방어와 정조의 화성행차에 대한 호위가 임무였다. 친군위도 선기대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감행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군사훈련이나 관무재를 비롯한 시험에서 뛰어
지금 대학들은 비상 상태다. 교육부가 구조개혁의 칼을 빼들었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이야기는 벌써 10년을 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구조개혁방안을 내놓지만 실제로 문을 닫은 대학은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엄포에 불과한 개혁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의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설립된 대학을 교육부가 마음대로 없앤다는 것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교육부가 지난달 28일 새로운 대학 구조조정 안을 발표하자 대학가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술렁거리고 있다. 교육부가 최근 내놓은 대학 구조조정 안은 전국 339개 대학(전문대포함)을 3년 주기로 3회씩 평가한 뒤 정량 및 정성평가를 통해 대학을 최우수, 우수, 보통, 미흡, 매우 미흡 등 5등급으로 나누어 최우수 등급을 제외한 대학의 정원을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말썽 많은 내신 등급제에 이어 대학도 돼지고기처럼 등급을 나누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한 오는 2023년까지 모두 16만명의 대학 입학 정원을 감축시키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목표다. 목표를 정하지 않더라도 지금 대학들은 스스로 정원감축 계획을 세우며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부실
과거에 책을 낸다는 것은 문인이나 학자들, 언론인, 그리고 각계의 몇몇 전문가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출판사들 역시 자존심을 내세우며 아무에게나 문호를 열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 한권을 갖는다는 것은 평생의 큰일이었고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책 출판 후 갖는 행사가 출판기념회다. 예전엔 대개 저자가 속한 단체나 후배 동료들이 출판기념회 자리를 마련하고 관계자와 가까운 이들을 초청해 함께 축하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출판이 비록 대중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손쉬운 일이 됐다. 출판비만 있으면 누구나 저자가 된다. 일부 출판물은 전문작가의 대필이라는 비아냥이 들리긴 하지만. 요즘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 소식이 잦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광역·기초단체장 출마자들은 잇달아 출판기념회 열고 얼굴 알리기에 바쁘다. 우선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과 같은 당 원유철 의원이 각각 ‘1시간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와 ‘나는 오늘도 도전을 꿈꾼다’를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원혜영 의원과 출마가 유력한 새누리당 박기춘 의원도 2월 중 출판기념회를 갖는다고 한다. 도지사뿐 아니라…
언제였던가! 대학 입학정원도 적고 수업료도 비쌌던 시절, 지방의 국립대학은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라디오를 통해 울려나오는 대학별 합격자 번호에 귀를 기울이며 초조해하기를 몇 번이던가! 합격자는 환희에 차서, 불합격자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대학 교정으로 달려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때부터인가 우후죽순처럼 대학이 생겨났다.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지만 심해도 너무 심했다. 거의 대부분의 고교 졸업자들이 대학에 진학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학교에 찾아가 합격여부를 재확인하는 일도 없어졌다. 인구의 수도권 집중과 더불어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인 서울(in Seoul)’을 고집함에 따라 서울과 경기·인천 등 수도권 대학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반면, 지방의 대학들은 한층 어려워졌다. 이제 지방 국립대학이나 유명 사학조차도 단지 지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낱 인기 없는 대학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학 입학정원과 고교 졸업자 수가 서서히 역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2018년을 전환점(turning point)으로 고교
봄에 피는 꽃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꽃을 눈 속에 피는 매화(雪中梅)라 한다. 눈 속에서 핀다하여 다른 어떤 꽃보다도 文人佳客(문인가객)들의 詩적 주제로 등장되었고 사랑을 받아왔으며 가치 있는 꽃처럼 여겨왔다. 조선 후기 李裕元(이유원)은 시를 통해 눈 속에 피는 매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설중매만 사랑한다(人愛雪中梅), 봄날에 피는 많은 다른 꽃들에게는 관심조차 없구나(不愛春日開), 꽃이란 때가 되면 알아 제때에 피는 것을(花則知其時), 사람들은 특별하게 피는 꽃만 가꾸려 하는구나(人則異其栽), 설중매가 아무리 다른 꽃보다 일찍 핀다고 하지만(早開頭百花), 봄날 따뜻한 기운은 때가 되면 돌아오게 되는 것을(香氣已自回), 사람들은 제철 아닌 향기만 좋다하고(人以非時香), 부질없이 빨리 꽃이 피기만을 재촉하고 있구나(徒事?鼓催), 하였다. 일찍 핀다는 것만으로, 눈 속에서 핀다는 것만으로 매화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적하면서 사람이 남보다 먼저 영리하고 밝다고 해서 반드시 높이 올라 출세하거나 꼭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쪽에 심히 치우친다거나 조급한 마음에 서둘거
여주시가 분만병원 짓는 데 소요되는 건물신축비, 운영비의 50%까지, 아니 그 이상도 부담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분만병원 설립 용역보고회가 열린 여주시청 상황실. 경기개발연구원 전문가, 시청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분만병원 설립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김춘석 여주시장의 모습에선 절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여주시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것은 지난 2년 전. 지역에 4개 산부인과가 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분만실을 폐쇄했다. 이 때문에 인근 이천·원주지역으로 원정출산에 나선 산모들, 촌각을 다투는 처지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1시간 가까이 길거리에서 허비해야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양수가 터지는 것은 아닌지, 차안에서 출산하는 것은 아닌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현재 여주시에서 21세에서 50세까지 가임여성은 전체 여성의 40%에 육박한다. 이런 산모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여주시는 지난해 9월부터 묘안을 짜내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예산지원을 받아 운영에 나설 수 있는 분만취약지 선정을 검토했지만 기준이 너무 까다로워 포기했다. 결국 여주시가 찾아낸 묘수는 분만이 가능한 경기
겨울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송천 떡 마을에 들렀다. 송천계곡을 끼고 솔숲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 한두 집에서 만들어 팔던 떡이 입소문이 나면서 마을 대부분이 떡을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고 한다. 민속 떡 체험관이 있어 체험을 원하는 사람은 즉석에서 떡메도 치고 인절미에 고물도 바르는 등 떡 만들기 체험을 할 수도 있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하지 않아 떡 체험은 할 수 없었지만 디딜방아도 보고 널뛰기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널뛰기는 상대방과 균형이 맞아야하며 무엇보다 가운데 중심이 잘 잡혀야 한다. 남편과 뛰다보니 남편이 쿵하고 구를 때마다 나는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내려올 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널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바닥으로 나뒹굴곤 했다. 몸이 무거워서 그런지 생각만큼 널뛰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널뛰기를 많이 했다. 가마니를 둘둘 말아 가운데 중심을 잡고 널따란 송판을 올려 널판을 만들고 동네아이들 불러들여 해가 저물도록 뛰며 놀곤 했다. 동생을 널의 중심에 앉혀 놓으면 널이 뛸 때마다 뒤뚱거리기도 하고 널이 삐뚤어져 다쳐 울면서도 연실 널 위로 올라앉곤 했다. 정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지만 그중 윷놀이가 가장
지난 1월 해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 행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IT 발전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 속에서 당당히 경쟁하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오늘은 CES 2014에서 느낀 점과 IT코리아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CES는 매년 1월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되는 세계최대 가전전시회로 1967년 뉴욕에서 시작되어 VCR(1970), CD 및 캠코더(1981), HDTV(1998), OLED TV(2008), 3D TV(2013)와 같은 시대와 문화를 견인하는 혁신적인 가전제품이 발표되는 경연장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이다. 올해 CES는 3천200여 업체가 참여하고, 약 15만명이 방문하여 역대 최대 규모였는데, 포춘지(Fortune)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기업 중 78%가 올해 CES에 참여했다. 이는 이제 IT가 전자제품을 넘어서 자동차, 의료기기 등 다양한 분야의 업체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CES에서 두드러졌던 특징은 필자가 경기신문의 지면과 상임위를 통해…
사진을 처음 찍은 한국인은 1860년쯤에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로 중국에 갔던 이의익(李宜翼)과 그 수행원들이다. 이들은 베이징(北京) 소재 러시아인 사진관을 찾아 초상 사진을 찍은 뒤 이를 갖고 돌아와 친지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언제 사진기술이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한성순보 1884년 2월14일자 잡보란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도입 시기를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기사는 이렇다. “지난 여름 저동에 살고 있는 우후를 지낸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으며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립했는데… 중략.” 촬영국 설치는 지금의 사진관 개업을 말한다. 내용대로라면 김용원은 1883년 여름에, 지운영은 1884년 봄에 사진관 문을 연 것이다. 이중 지운영은 개업과 동시인 1884년 3월16일, 고종의 어진(御眞)을 촬영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사진 기자재는 매우 고가였다. 때문에 사진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고 자연히 대중보다 특권층이나 부유층의 독점물로 인식됐다. 해서 수난도 많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사진관을 파괴하고 사진을 찍는 행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