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7주기인 16일 봄비가 내리는 전국 곳곳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이 이날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펼쳐진다. 기억식에는 유은혜 교육부 장관, 전해철 행안부 장관, 문성혁 해수부 장관을 비롯해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윤화섭 안산시장 등과 4.16가족협의회 회원, 시민 등이 참석해 기억영상을 공유하고 추모사 낭독 등의 시간을 갖는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2014년 완공되는 안산 생명안전공원 선포식도 함께 열려 의미를 더할 예정이다. 사고 해역인 진도 팽목항에선 오전 10시부터 7주기 기억식이 진행 중이다. 세월호 선체 앞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기억사 낭독, 연대사 낭독, 추모공연, 결의문 낭독 등 순으로 진행된다. 오후 1시40분부터 오후 4시까지는 팽목항 세월호기억관 앞에서 추모 공연 등이 이어진다. 세월호 출발지였던 인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내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옆 광장에서도 오전 11시 일반인 희생자 7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세월호 목적지였던 제주에선 오후 4시부터 제주시 봉개동 세월호 제주기억관에서 추모문화제r가 열린다. 세월호 제주기억관의 세월호 참사 7주기 준비
그는 점심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하교시간엔 집으로 돌아와 형제를 챙기던 평범한 엄마였다. 고등학생이던 작은 아들 호성 군은 그런 그에게 딸 같은 존재였다. 저녁엔 호성이와 속닥거리며 하루 일과를 공유했고 입버릇처럼 “정 여사, 힘내”라고 엄마를 다독이던 아들을 아이 아빠가 질투할 정도였다. 그러던 호성이가 이제 없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신호성 군은 현재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다. 1994년에 안산 고잔동에 이사와 20여 년 한 곳에 살아온 정부자 씨는 동 반장으로 활동할 만큼 활발하지만, 또 가족만을 위해 살던 가정적인 성격이었다. 동네 이야기 외엔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 그저 내 가정을 안전하게 살도록 지켜주는 나라에 고마워만 했다. 2014년 4월 16일 아이 아빠의 직장 동료로부터 “호성이가 어느 학교냐,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을 태운 배가 넘어졌다는데 확인해봐라”라는 전화가 왔을 때만 해도, 놀란 마음에 호성이 아빠와 통화를 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선박 기술이 최고라는데, 그럴 리 없다”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정부자 씨는 7년이 지난 1월 청와대 앞에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며 눈물을 흘린다. 문재인 대통령을
어느덧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는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 등 희생자 304명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노란 리본’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7년 전, 전라남도 진도군의 팽목항과 안산시에는 단원고 학생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이 곳곳에 내걸렸다. 노란 리본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미국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남편을 둔 아내나 가족들이 나무에 리본을 묶고 무사 귀환을 바라며 기다리던 것에서 유래됐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4세기 당시,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노란 리본을 착용한 여성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 ‘그녀는 노란 리본을 착용하고 있다’가 만들어졌고, 이 노래는 1600년대 초 유럽 청교도인들에 의해 미국으로 전해졌다. 또 1642~1651년 영국 시민전쟁 당시 청교도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노란 리본과 띠를 둘렀다고 한다. 이처럼 노란 리본은 여러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 인식 리본의 한 종류로, 무사생환을 바랄 때 등 다양한 의미에서 사용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2014년 봄, 세월호 희생자들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온라인을 통해 노란 리본
◆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김은지 지음/마음의 숲/244쪽/1만4500원 "처참하고 잔인한 재난의 경험 속에서 만났던 보석 같은 순간과 기적 같은 희망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이 책의 저자 김은지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바로 단원고에 가서 아이들을 돌봤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놓아둔 소화기처럼 지냈다는 그녀. 학교에 출근한 지 한 달 가까이 컴퓨터도,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 쯤 뒤인 7월, 학생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1박2일로 행진을 나섰고, 근처 마트로 가 운동화를 사 신은 뒤 무작정 따라가 함께 한 것이 단원고와 자신의 연대가 시작된 순간이라고 말한다. 물론 다른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이 더위로 쓰러지거나, 공황 발작을 일으키거나, 과호흡이 오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뿐. 이후 학교 꼭대기에는 '마음 건강 센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쿨 닥터가 됐고,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선택에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저자는 안산에 위치한 의원과 센터장 활동을 병행하면서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의 회복에 힘을 보태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