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화연대(회장 고경일)가 군부 탄압에 맞서 투쟁 중인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살려내기 위한 마음을 담아 전시를 개최한다. 펜으로 연대를 선언한 우리만화연대는 미얀마가 학살 없는 일상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24일부터 10월 8일까지 서울시 중구 한길사뮤지엄에서 ‘미얀마를 살려내라’ 전시를 선보인다. 고경일 우리만화연대 회장은 “이번 전시는 곧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출품한 작가들은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날카롭게 검증하는 ‘잠수함의 토끼’의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고 회장이 출품한 작품을 보면 군부가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는 사람을 총으로 쏘는 모습이다. 사람이 아닌 한 송이의 꽃이 꺾이는 형상으로 표현했으나 참혹한 현실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얀마 국기를 배경으로 한 이정헌 작가의 ‘미얀마에 자유를’ 작품 속에는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시민들과 앞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최정규 작가는 지난 3월 군부의 총탄에 맞고 사망, 저항의 상징이 된 19세 소녀 치알신을 그렸다. 작품명은 치알신이 당시 상의에 적었던 메시지 ‘모든 것이 잘 될 것(everything will be ok)’과
한국 민주화운동이라는 긴 여정의 또 하나의 이정표, 91년 5월 투쟁 30주년을 맞아 그 성과를 평가하고 의미를 학술적으로 풀어내는 담론의 장을 마련합니다.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와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 공동 주최·주관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하는 ‘91년 5월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 세미나’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일시 5월 28일(금) 오후 2시~6시 ■ 장소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 ■ 주최/주관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민주화운동기념공원 ■ 후원 경기신문, 한국언론진흥재단
[ 경기신문 = 이성훈 기자 ]
91년 5월 투쟁은 당시 명지대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지면서 일어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규모 저항을 일컫는다. 강경태 사망 사건을 통해 노태우 정권의 대한 분노는 1991년 4월 29일 박승희 전남대 학생 분신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겹쳐지면서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이끌어 냈다. 5월 투쟁은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한 대중투쟁으로 평가 받는다. 학생·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이 전국에서 부문운동 조직을 매개로 단결했다. 이로써 '민중주체의 형성 가능성'을 보였다. 참여자들은 민족자주, 민중권력, 노동자권력, 민중해방 등 구회를 외치며 대안권력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학생인권과 노동기본권 보장으로 인권담론의 지평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1991년 4월 ▲ 4.26 = 강경대 명지대 학생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 중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 ▲ 4.27 = '강경태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결성 ▲ 4.29 = 박승희 전남대 학생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 ◇ 5월 ▲ 5.1 = 김
“내가 가진 것 모두 내어 줄 테니, 노태우 아들 데려오라고 했어요. 두말 않고 돌아가더군요.” 14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91년 5월 투쟁 30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씨(80)는 강경한 어조로 당시를 떠올렸다. 아들 강경대가 사망한 후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백방으로 뛰던 강민조 씨를 노태우 정권은 다각도로 압박했다. 어느 날은 집으로 찾아와 20억 원을 주겠다며 회유해 좋은 말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랬더니 금액이 적어서인 줄 알았는지, 50억 원을 통장에 넣어주겠다고 또 찾아와 “돈으로 아들을 팔라는 말이냐. 노태우 아들을 데려오면 원하는 것 다 해주겠다”라고 쫓아냈다. 강 씨의 울분은 경대가 못 이룬 꿈,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강민조 씨는 현재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장을 맡아 팔순이 된 지금도 다양한 민주화운동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아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꿋꿋하게 산다지만, 여전히 3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진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경대가 시위를 하다 다쳐서 영안실에 있다고. 다쳤는데 왜 영안실에 있지
봄비가 적시고 간 5월의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코로나19로 방문객은 비록 줄었지만, 이곳에 잠든 60기의 민주화 운동 관련 희생자 영령은 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가족과 친구들을 기다린다. 묘역 한 편에서 강경대의 비석을 바라보는 김동민 민주화운동기념공원사업소장의 눈빛이 슬프다. 김동민 소장은 당시 대학 새내기던 강경대에 대해 “백골단에 맞아 죽었다”라고 했다. 김귀정에는 “대한극장 인근 시위 중 경찰에 짓밟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입에 담기 힘든 표현이나 사실이었다. 91년 5월 투쟁으로 꽃처럼 스러진 영혼이 13인이다. 이중 10명은 분신했다. 학생,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촉발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을 외치다 경찰폭력에 의해 사망한 일이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일이 벌어졌다. 담담히 이를 설명하는 김동민 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민주화 운동은 한 판 승부가 아니에요. 성과가 없다고, 패배했다고, 결국 제압됐다고 평가절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동민 소장은 ‘5월 투쟁’의 역사적 위상을 하루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5월은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쟁의 깃발을 들었던 이들이 잠든 거룩한 곳, 민주화의 성지이자 이들을 기억하는 상징적 공간이 이천에 있다. 모가면 어농리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소장 김동민)은 2016년 개원해 민주주의 역사의 현장이 됐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민주공원)엔 현재 60기의 열사가 영면했다. 민주공원은 앞으로도 전국 곳곳에 잠들어 있는 민주주의 열사들을 이 곳으로 모실 계획이다. 이장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총 136명의 열사들이 이곳 민주공원에 영면하게 된다. ‘1991년 3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민중노래패 ‘땅의 사람들’ 가입, 민주화 시위에 참여, 1991년 3월 총학생회 진군식 시위 중 학내진입 전투경찰의 직격 최루탄으로 안면 부상,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군사 정권 타도, 학원자율화 완전 승리’ 등을 주장하며 시위 중 이를 진압하는 백골단의 쇠파이프 폭행으로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심장막 내출혈로 사망. 1972년 2월 4일 서울 출생 1991년 4월 26일 사망.’ 묘역 가운데 강경대의 묘 비석엔 그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아무런 죄 없이 조국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며, 더 행복한 세상을 꿈꿨던 대학 새내기의 일생을
포탈 검색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를 찾아봤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사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고 설명돼 있다. 그럼 민주주의는? 당연히 다수결 원칙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의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좀더 깊이 있는 지식과 넓은 식견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사회를 들여다보고 이슈를 빠르게 파악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정치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차재훈 원장과의 만남은 연신 웃음이 끊이지 않을 만큼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면서도 '정치학'이라는 학문의 매력에 묘하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마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라도 듣고 있는 듯 흥미진진하게 설명하는 차 원장의 입담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그와 나눈 대화 내용의 상당한 무게감 때문이었다. 작게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부터 나아가 경기도, 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 정말 필요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