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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청춘]팔순의 ‘화성 알리미’역사를 동화처럼 술술~

문화관광해설가 심원섭

 

“자! 여러분 다시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세요.

이 곳이 바로 화성행궁의 중앙인‘봉수당’입니다.

이 곳에서 정조대왕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거죠.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심 원섭(81)할아버지.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목소리는 쇠처럼 쉼없이 단련된 듯했다.

여기에 사쁜한 몸짓까지 곁들여 당시를 재구성하자 눈앞에는 혜경궁 홍씨의 성대한 회갑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심 할아버지가 정성껏 대하고 있는 관광객은 일본 고교생들. 심 할아버지는 이들을 정조대왕 시대로 이끌었다.

시간여행의 선봉장인 셈이다.

심 할아버지의 구수한 옛 이야기는 계속됐다. “정조대왕은 어린시절 할아버지인 영조대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었을 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하지만 어린 정조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죠. 이런 슬픔을 안고 자란 정조가 아버지의 원침(묘소)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에 올 때마다 머물던 곳이 ‘화성행궁’입니다”

심 할아버지는 화성행궁 안을 내 집마냥 능숙하게 안내했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정조의 슬픈 역사 부분을 얘기할 때는 감정이입이 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얼굴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일본 학생들도 심 할아버지의 감정에 동화된 듯 잠시 숙연해졌다.

그렇게 잠깐.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반응을 훓어보고는 마음을 추수려 다시 신명나게 설명을 했다. 학생들의 분위기도 덩달아 살아났다.

숫기가 좋은 한 학생은 탄성을 터트리기도했다.

“자! 드디어 화성행궁의 마지막 코스인 낙남헌을 소개해야 하는데요. 이 곳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기간 중 과거 시험과 양로연(노인을 공경하고 풍습을 바로잡기 위해 베풀던 잔치)등 다양한 행사가 치뤄졌던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밝힐 때가 온 거 같은데요”

학생들은 조용했다. 할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쭉 둘러본 화성행궁 중 지금 이 곳, 낙남헌만 빼면 전부 가짜입니다”

학생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속았다는 반응들이 나오자 할아버지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곳들은 모두 훼손되었다가 복원된 것이죠. 자 그럼 왜 다른 곳은 훼손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왜 낙남헌만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학생들은 갑작스런 심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한·일간의 슬픈 역사 이야기를 할 참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과 한일합방을 했어요. 말로는 동등한 한일 합방이었지만, 일본은 강했고 한국은 약했었죠. 결국 식민통치를 했던 겁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일본은 한국의 역사가 담긴 이 곳을 헐어 병원을 짓고 경찰서를 세웠습니다. 그 당시 비어있는 땅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곳을 고집했죠. 이것이 일본이 행한 한국역사 말살정책입니다”

곧이어 위안부 문제부터 신사참배까지 일본인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배우지 못했거나 잘못 알았던 역사에 대해 할아버지는 차분하고 곧은 말투로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시절 자신의 삶에관한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일본 학생들은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착찹한 기색을 보였다. 일부 학생은 할아버지에게 사과드린다는 말을 건네기도했다.

 

 

학생들은 그만큼 순수했다. 이 대목에서 할아버지의 연륜이 보이는 듯했다. 학생들의 심기를 알아차린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가까이 있어요. 그만큼 서로 도우며 살아야해요. 과거의 아픔은 훌쩍 뛰어 넘어야죠.

학생들처럼 일본 정부도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나라가 될 수 있겠죠.”

할아버지는 이렇게 화성행궁 여행을 끝맺었다. 화성행궁을 떠나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다시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그들에게 화성행궁 속의 심할아버지는 오래오래 기억될 것같다.

심 할아버지가 문화관광해설사로 나선 것은 꼭 23년전.

그중 7년은 화성행궁에서만 보냈다. 할아버지는 전국을 통틀어 나이가 가장 많은 해설사다. 해설사 일을 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점이 있다. 다름 아닌 일본인들에게 왜곡된 한·일간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어로 한국의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회화 수준을 넘는 깊은 공부가 필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런측면에서 보면 할아버지의 일본어 실력은 대단했다.

“난 일제시대에 공부한 사람이잖아요. 그땐 국어를 못 배웠어요. 당시에는 모든 수업을 일본어로 진행했고, 생활에서도 일본어가 주 언어였죠.” 할아버지는 공부가 좋아 40리길도 불평 없이 걸어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일본어가 그의 인생 2막을 여는 열쇠가 됐다.

“1981년 9월 30일였나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경쟁국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잖아요. 당시 TV와 라디오에서 올림픽 홍보를 위한 언어봉사 요청 방송이 많았어요. 그때 이게 내일이라고 생각한거죠.”

할아버지는 1984년 한국관광공사의 ‘굿-윌’ 가이드란 시스템을 통해 일본어 가이드를 본격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 통역원 모집시에는 단숨에 서울로 달려가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그때도 내 나이가 젤 많았어요. 대부분 학생들과 35세 미만의 젊은 사람들이 지원했었죠. 하지만 일본어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보람이었구요”

할아버지는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수원에서 열린 핸드볼 경기의 운영본부에서 안전팀 계장으로 일했다. 1988년 올림픽 때는 운영본부 의전담당관실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2002년 월드컵’에서는 운영본부 통역 팀장을 지내기도했다.

심 할아버지는 현재 수원 화성의 문화관광해설사와 지역 동사무소 자치센터의 일본어 강사를 역임하며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심 할아버지는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규칙을 정해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저에게 해설을 부탁하러 오길 기다리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관광객들에게 다가가 우리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하는 편이지요”

이러한 심 할아버지의 노력은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들에게 우리문화를 소개했다는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할 수 있는 일 을 찾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심 할아버지가 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비법이다.

이 외에도 심 할아버지는 지금껏 건강하게 봉사할 수 있는 비결로 욕심을 줄이는 것과 한결같이 지켜온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소식을 꼽았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20분간 간단한 체조와 운동을 하고 식사는 규칙적으로 소식을 하는 것, 10시에 시작하는 강의에 맞춰 오늘 할 강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가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지켜온 심 할아버지의 규칙이다.

“일본어 강의를 하거나 문화관광해설사 일을 할 때, 보통 2시간은 서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체력을 유지하려면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중요하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인 만큼 아프다가도 일을 하는 동안엔 까맣게 잊어버리니 이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심 할아버지는 작년 6월, 말리는 자식들을 뒤로 하고 유럽 10개국 여행을 보란듯이 혼자 갔다 왔다.

심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세계는 더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닌 도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 할 것 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결국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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