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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으로 일군 ‘유한’의 ‘무한’ 꿈

유한 콘크리트산업㈜ 유 경 희 대표

 

유한 콘크리트산업(주)의 유경희(41)대표는 어머니가 운영했던 회사를 2001년 이어받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 운영한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유 대표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고시공부 중이었다. 37살, 늦은 나이에 결혼한 지 2년 만에 소중한 첫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콘크리트 회사의 여사장이 되어야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었기에 직무 대행으로 잠시동안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를 맡겠다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빚이 굉장히 많았어요, 잘나가던 회사는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직격타를 맞았죠”라며 유 대표는 그 당시 상황을 담담히 얘기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건설경기의 호황과 함께 승승장구 하던 회사는 제2의 도약을 위한 안성 대단위 공장 증설과 독일 수퍼 마사의 기계 도입 등 공격적인 경영을 시도했다.

하지만 1997년 2월 기계를 도입 후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공장은 그 해 11월 IMF라는 복병을 만났다.

“달러 대출을 받아 기계자금을 마련했어요. 근데 새 기계를 도입하자마자 IMF가 터졌죠”

1달러당 700원대에 빌렸던 대출은 천청부지로 뛰어올라 그 두 배인 1천400원대를 육박했다. 가만히 앉아서 빚이 두 배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거기다 기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계 설비를 해주던 사람이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 설상가상이었다.

유 대표는 “기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믿었던 사람이 도망가면서 제품을 찍는 족족 불량품이 속출했죠”라며 “썩지 않는 콘크리트는 특성상 불량품이 나와도 없앨 수가 없어요. 깰 수도 묻을 수도 없었기에 버리는 것도 비용이었죠”라고 말했다.

늘어난 빚에 매출이 나도 모자랄 판에 불량품 처리에 비용이 더 들어갔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힘든 상황이었다. 빚은 빚대로 늘어나 있었고 기계 쪽으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던 유대표는 기계부터 알아가야 했다.

“이쪽 분야를 알았던 것도 아니었고 워낙에 기계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거기다 처음 기계 도입 후 완성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이라 직원들과 함께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했죠”

워낙에 힘든 상황에 회사를 물려받은 유 대표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위의 시선이었다.

“나란 사람은 지금껏 온실 속의 화초처럼 힘든 것 없이 공부만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처음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나를 사장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동종업체 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내가 조금 하다가 손들고 나갈 거라 생각했죠”

우선 기계부터 알아야 했다. 비상시에는 사장이 직접 기계를 돌릴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직원들과 함께 하나하나 배웠고 기계에 대한 모든 공정을 캐드작업을 통해 A4용지에 그려 넣어 메뉴얼화시켰다.

“기계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기계를 A4용지에 그렸고 각각의 연결과정을 다 메뉴얼화시켰어요. 이제는 누가 와서 하더라도 그 메뉴얼을 통해 할 수 있도록 했어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회사 창업때부터 함께 해 온 가족같은 직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 회사가 법인 설립한지 이제 21년인데 직원들 평균근속년수가 15년이 넘어요. 그만큼 기술력과 훈련도가 높다는 뜻이죠. 회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직원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월급을 많이 올려주지 못해도 이해해줬죠”

이 외에도 술이나 골프 등 남자들만의 영업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이들때문에 저녁모임을 잘 가지 못해요. 거기다 술도 잘 못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택했죠”

유 대표는 여성이라는 약점을 장점으로 십분 살렸다.

“내가 여자인만큼 거래처 사람들의 부인을 챙겼어요. 기념일을 체크해서 남편이름으로 선물을 보냈죠.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이러한 유대표의 노력과 건축자재 분야에서 20여년을 해온 만큼 ‘유한’이라는 브랜드 인지도가 더해져 그 효과가 나타났다. 기계문제를 해결, 불량품을 줄이고 제품의 품질을 높이고 나니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유 대표가 회사를 맡은지 3년만인 2004년 회사는 안정화됐다.

유대표는 사업을 운영하는 여성 CEO로서 가장 힘든 점으로 육아 문제를 꼽았다.

처음 회사가 풍전등화였을때는 회사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최우선이 됐다. 지금하고 있는 일도 아이들이 있기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유한 콘크리트산업(주)는 지금의 안정을 넘어 또다른 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중이다.

“최근 화두중 하나가 환경인 만큼 시멘트 유해논란을 불식시키면서도 고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 개발이 진행중”이라며 유 대표는 “앞으로 직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유한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밝혔다.

여성으로서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유대표. 그녀는 “더이상 여성기업인으로서 특혜받는 것은 여성기업인 스스로 사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경희 대표는

1980년 아버지가 설립한 회사는 꼭 10년만인 1991년 췌장암으로 쓰러지시면서 어머니가 물려받았다. 20여년을 집안 살림만 해오던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콘크리트회사 여사장이 되어야만 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주택건설 200만호에 따라 건설경기는 이례적인 호황을 맞았다. 건설토목자재가 주 품목이었던 회사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1990년 3월 상공부장관에게 국가산업발전공로 표창을 받았고 1992년 7월 한국산업은행의 유망중소기업체 지정 선정, 1995년 3월 공업진흥청장에게 우수규격제품 생산공로표창을 받았다.

승승장구였다. 작고 여리기만 했던 어머니는 힘든 내색 없이 훌륭하게 회사를 운영했고 법대를 졸업한 딸은 별 고생 없이 고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어머니가 쓰러졌다. 그 날 딸의 운명도 바뀌어 오늘날 유한 콘크리트산업(주)의 주인이 됐다. 아버지가 설립하고 어머니가 키워온 회사를 물려 받은 유경희 대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법무부범죄예방위원평택협의회위원, 2005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됐고, 경기지방중소기업청으로부터 경기우수경제인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2006년 대한민국발명특허대전 동상’을 수상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활동으로 대통령표창도 받았다.

현재에는 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 감사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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