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갈현동에 위치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 임정란 명창의 자택으로 가는 왕복 2차선 길은 고즈넉했고 양쪽에 늘어선 가로수는 단풍이 곱게 들어 고운 자태를 뽐냈다.
45년을 국악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길을 걸어온 임 명창은 본지 기자가 찾아간 날 평상복을 입고 있어 평소 단정한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과는 대조를 이뤘다.
“갈현동은 예부터 예인촌으로 소문이 났어요. 우리 집안도 광대 집안이라 불릴 만큼 가·무·악에 능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주변 환경과 그 피가 흐르는지 우리 소리에 입문할 당시 주저는 없었어요.”
그러나 임 명창은 20세 늦은 나이에 국악 문턱을 밟았다.
한때 부유했던 가세는 기울어 생계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빈곤해 마음 한켠엔 국악을 하면 밥은 먹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홀어머니는 일언반구 대꾸 없이 딸의 진로를 받아들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보유자로 선소리 타령 대가인 이창배와 정득만 선생을 사사했다.
당시 선소리타령의 전수 장학생은 모두 남자들로만 구성돼 여성으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10여년 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인 묵계월 선생 문하로 자리를 옮겼다.
전수 장학생 과정과 전수조교를 거쳐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후보에 오르면서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섰다.
“멋모르고 뛰어 들어들었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이 심했지요. 늦게 시작한 탓에 진도가 더딘데다 가족 봉양하느라 공부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제 다시 그런 인생을 살아나면 못할 것 같아요.”
중요무형문화재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던 그에게 1998년 경기도립국악단 악장 제의가 들어왔다.
스승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침체돼 있던 경기민요를 활성화시켜야겠다는 일념에 망설이다가 응했다.
1인1창 운동, CD, 비디오 제작 시·군 배포, 아마추어 대회 개최 외 경기민요를 도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각종 무대에 서는 등 바쁜 일정으로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나 보람은 남달랐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지 2년 뒤인 2001년엔 (사)한국경기소리보존회를 결성, 이사장을 맡아 도내 12개 지부를 개설, 경기소리 뿌리를 확고히 내리는 기반을 다졌다.
노인층을 대상으로 경로잔치에서만 불리는 게 민요라는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중화 작업에도 뛰어들었다.
소리극인 ‘낚시대장 서얼’, ‘과천골 딸부자집 경사났네’, ‘과천현감 민치록’이 대표적 작품으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창작곡조에다 시나리오도 재미있게 구성, 젊은 층에게도 호응을 받았다.
학교, 등산로입구, 서울랜드, 경마장 등 과천 관내 곳곳을 도는 ‘찾아가는 공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는 27일 (사)한국언론인연합회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받는 그는 평소 품고 있던 희망사항을 말했다.
“도내 소외계층과 낙후지역을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게 바람입니다. 그러나 소요경비문제로 엄두를 못 내고 있지요. 경기도 문화재단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르면 가능한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