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와의 만남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즐겁다.
지난 25일 과천시 문원동 청계산 자락에 자리한 청마루란 토속음식점에서 한국 화단의 거봉 문암(門岩) 박득순 화백과 그의 문하생들이 뜻 깊은 만남을 했다.
이제는 스승의 품을 떠나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는 화가와 아직은 배움이 남았다고 그의 겉에 머문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는 ‘제2회 문암미술제’.
작년 이맘때 ‘문암회’을 창립하고 그 해 첫 전시회 뒤 두 번째 여는 모임이다. 번듯한 화랑이 아닌 자연 속 전원풍인 한식집을 택한 것은 찾아가는 미술전이란 기획의도가 담겨있다. 별도의 전시공간이 아닌 식당 곳곳 벽에 전시된 그림은 이곳을 들른 식객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애호가들에게 각자의 솜씨를 뽐낸다.
전시된 작품은 문암회 회원 33점에 박 화백의 한점까지 합해 수묵담채화 34점.
제자들의 작가세계는 문암과 꼭 닮아있다.
작품세계의 마지막 단계는 추상화라고 말했던 박 화백이 귀향하듯 최근 천착한 한국화의 향기가 전시장을 진동하고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그림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붓을 직각으로 세워 여러 번 덧칠 없이 한 번에 획을 긋는 일필휘지의 절묘한 기법과 주변 사물을 과감히 배제하고 주인공만 강조한 간결한 처리, 한국화의 특징인 여백 등이 화폭에서 숨 쉬며 나래 친다.
소재 또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장돌뱅이인 허 생원과 청년 동이가 왼손잡이인 것처럼 쏙 빼다 박았다. 이제는 농촌조차 구경하기 힘든 초가집과 한적한 포구, 은은한 자태를 뽐내는 국화와 눈부신 목단 등등.
국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경기미술대전 특선 등 스승의 화려한 경력을 쫓아가듯 각종 미술대전에서 입상한 제자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빼어나다.
‘기다림’(김영희)은 낙락장송의 힘찬 기운과 소나무 특유의 갈라지고 터진 수피표현이 도드라져 보인다.
‘게의 일과’(김경호), ‘게’(이은주)에 등장하는 꽃게는 살아있는 듯 사실삼이 뛰어나고 반추상인 ‘6월’(전남숙)은 목단의 화려한 색상과 정렬적인 표현에 눈이 빨려 들어간다.
촘촘히 엮은 버드나무 꽃바구니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국화와 바구니’(고선경)는 재래종인 작은 꽃잎의 노란 국화가 앙증맞고 ‘겨울’(남정훈)은 추억으로 남은 초가집과 널따란 마당에 소복이 내린 눈은 어릴 적 추억으로 안내하는 손을 내민다.
‘청국화’(박종임)는 국화의 적당한 배열과 가녀린 줄기가 인상적이며 국화향기(박현숙), ‘국화와 나비’(설경미)는 국화에 살그머니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가 화룡점정이다. 한 줄기 국화가 하늘을 받드는 ‘가을’(오복화)은 독야청청하고 ‘포도’(이정구)는 이육사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란 ‘청포도’ 시구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이날 스승과 제자는 밤이 깊도록 그림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는 등 오순도순 정담을 나눴다.
김영희 회장은 “스승을 모시고 한 자리에 앉아있다는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라며 “문암회를 더욱 발전시켜 미술계에 기여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황토빛 분위기가 감돌아 다정한 벗과 차 한 잔 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싶은 곳, 청계산을 바로보고 있노라면 시(詩) 한 구절과 화제(畵題)가 절로 떠오를 것만 같은 곳인 청마루의 전시회는 오는 3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