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경마는 일본인 마주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초창기 경마의 기수들도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한인기수들은 존재해 최초의 기수로 기록된 사람은 김용백이었다.
원래 목장에서 일하던 마부인 김용백은 1921년 5월 7~8일 양일간 용산연병장에서 개최된 조선경마대회에 출전했다.
조선경마대회는 조선경마구락부의 모체인 경성승마구락부에서 개최한 최초의 공식경마대회로 대부분 일본기수로 구성되었으나 초청기수만으론 숫자가 부족하자 목장 마부 중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들을 선발, 후보기수로 기승시켰다.
그는 이후 다른 대회에 출전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김용백에 이어 등장한 한국인 기수는 1921년 9월 23~25일 여의도경마에 출전한 김자근봉(金者斤奉, 나중에 김승배로 개명)과 이복남으로, 이들도 여의도 황정목장의 마부였다.
김자근봉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나카야마 경마구락부에서 정식 기수 면허를 취득, 활동해 제2회 천황배 대상경주에서 ‘하세파크’에 기승,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뚝섬경마장에서 이름을 날렸던 김승길 조교사는 김자근봉 기수의 아들이고, 현재 서울경마공원에서 활약 중인 김학수 조교사(44조)는 그의 손자로 3대에 걸쳐 경마와 인연을 맺었다.
이복남 기수는 여의도 경마대회 이후 꾸준히 국내에서 활동하다 해방 전에 은퇴했다.
1930년대에 활동했던 한국인 기수로는 채일묵과 정태생이다.
채일묵은 1932년 일본 야마구치 경마장에서 기수생활을 시작, 1938년까지 일본 경마계에서 활약했으나 기수 은퇴 후 귀국, 1942년 조선마사회 직원으로 입사했다.
마사회 입사 후 재결·마사·경마업무·마사공원·목장 등 각 부서를 두루 거치며 경마에 한 평생을 바쳤다.
지난 1973년 타계한 그는 서울경마공원에 그의 공을 기리는 흉상이 서있다. 정태생은 1930년대 일본 한신경마구락부에서 면허를 취득한 후 일본과 중국경마장을 전전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귀국, 신설동 경마장에서 해방 전후 기수로 활동했다.
해방 당시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는 20여명의 한국인 기수들이 있었는데, 서울 출신 최일선과 정주섭, 북조경마장 출신 김정식과 김완기, 일본경마장 출신 김자근봉(김승배)과 정태생, 만주경마장 출신 최인철, 한승길, 권인덕, 박원봉 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