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에서 직원 복리 후생을 위해 예산을 쓰고자 했지만 항상 여의치 않았다. 예산이 다소 경직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난 평소 나를 아끼는 선배에게 작지 않은 금액을 감히 청했다. 또한 이러한 돈이 후원금으로 처리될 경우, 역시 직원의 복지 후생에는 쉽게 쓰일 수 없기에 그저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럼에도 선배는 기꺼이 상당 금액을 나에게 주었다.
선배의 종자돈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였다. 오랜 숙고 끝에 직원 수에 비례한 일정 금액을 각 팀별로 분배해 주고, 팀장이 팀원들과 논의하여 자율적으로 쓰도록 했다.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문화 활동비였다. 다소 모호한 활용일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난 선배에게 우선 양해를 구했다. 모호해 하기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구체적으로 식사나 음주, 영화 관람, 스포츠 경기 관람, 도서 구입, 근교 여행 등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 직원들은 이 밑천으로 분명 유쾌한 활동을 할 것으로 확신했다. 또 그 과정에서 ‘우리’라는 정서가 보다 공고해질 것을 확신했다. 나아가 이는 자신이나 팀의 발전, 나아가 복지관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도 확신했다.
직원들이 선택한 문화 활동은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이구동성으로 만족스럽고, 좋은 기회였다고 하였다. 활동 이후 결과 보고가 그 의무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적인 활동 내용과 그 결과 등이 내 귀에 줄곧 들려왔다. 한 팀의 경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평소 감히(?) 갈 수 없었던 한강 유람선에서 식사를 했다.
다소 호사스런 식사를 마친 후 한 직원이 우연히 동문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물었다, ‘여기에 왠일이냐’고. 그 직원은 ‘팀별 문화활동비를 지원 받아 식사하러 왔다’고 답했다. 부러운 표정의 친구는 ‘너네 복지관에 그런 예산도 있냐’며 부러워했다. 한 직원과 그 친구의 짧은 담소로 팀원 모두는 짐짓 뿌듯해 하며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목적은 이처럼 달성되었다. 복지관의 경직된 예산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직원 대상의 파격을 난 활수(滑手)한 선배의 종자돈으로 맘껏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복지 기관의 본래 목적은 분명 서비스 대상자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쉬 파악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난 다른 방식으로 대상자의 행복 여부, 즉 기관의 본래 목적 달성 여부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방식 중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대상자의 행복을 위해 실무하는 사회복지사의 행복이다.
우선 서비스 전달자인 사회복지사가 행복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업무에 만족하여 표정이 살아있을 때 대상자의 행복은 분명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사회복지기관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의 처우는 다른 직종에 비해 매우 낮은 실정이다. 얼마전 경기도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참석하였다. 향후 경기도 사회복지의 발전을 위한 여러 사업이 제시되고 논의되었다.
물론 사업 자체가 중요함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그 전달자인 사회복지사가 행복하여야만 행복한 사회복지 서비스가 전달된다는 나의 소신을 언급하였다.
물론 모든 사회복지사의 처우 수준을 높이는 것이 예산 등으로 다소 무리가 있음은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열심히 하였던 또는 열심히 하려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지원, 즉 다양한 인센티브의 활용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당시 공무원 등 여러 위원들로부터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대상자만이 우선적으로 인식되었을 뿐, 그 전달자 즉 사회복지 전문가는 다소 경시된 결과였다.
사회복지 서비스는 아름다운 서비스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서비스를 전달하는 아름다운 전문가 그리고 아름다운 실무 환경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결코 많은 예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전문가의 사기를 진작하려는 여러 노력에 의해 전문적 자부심은 비롯될 수 있다. 나아가 아름다운 사회복지 실무로의 몰입도 가능할 것이다.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나는 늘 아름다운 사회복지사를, 그리고 아름다운 전문 실무의 수행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를 주장함이 이렇듯 자아류(自我流)의 변명으로 길어짐은 다소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