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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농업전문경영인] 20. 수란원예 이금수 대표

 ‘무욕의 삶’ 꽃피우는 국내 화훼업계 대부

그 시절은 암울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 노력의 결과에 상관없다. 누군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이끌림을 받은 곳을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것을 평생 업으로 살아오던 시대였다.

요즘 20대 청년들에게 북한식 공산·사회주의처럼 직업 선택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약하자는 게 아니다. 일제 침략기 이후 우리 민족의 뜻과는 다르게 외세에 의해 국토 강산이 두 동강 났을 때다. 당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선조들은 어떤 선택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입에 풀칠하기 위해 생존하고 포탄과 총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광활한 자유와 생명의 대지를 찾아 납작 엎드린 채 운명이라는 기구한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장춘(1898~1959) 박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현재까지도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 박사는 한국근대농업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만약 없었다면 해방 직후 우리는 김치는 물론이고 오늘날 제주도의 감귤도 맛보지 못했을 터.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쌀, 보리 등의 주곡 생산지로서 수탈했지만 배추 무 등 채소농사는 상대적으로 방치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해방 직후 각지에 흩어졌던 해외 교민들이 밀려오자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세대는 식량은 물론이고 채소 부족에 허덕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육종학자 우장춘을 국가적 차원에서 맞이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알려진 것과 달리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은 우장춘이 아니다. 바로 유전학자 기하라 히토시(木原均)가 장본인이다. 우 박사가 한국에 온 뒤 후배 연구자들에게 육종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해 보여준 게 와전된 것이라고 하니,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겠다. 우 박사는 1950년 내한해 십이지장궤양으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농업에 만년의 삶을 바쳤다.

우 박사가 시대 모순으로 기구한 운명적 삶을 살았다면 남양주시 진건읍 배양 2리 939에서 국내 화훼 분야 역사를 잇고 있는 이금수(64) 수란원예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는 원래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덕유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화훼 분야에 종사하게 된 계기가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우장춘 박사 때문에 현재의 이 대표가 있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물론 이 대표는 우 박사처럼 어지러웠던 역사의 한 복판에 서진 않았다. 다만 그가 어릴 적 살았던 지역이 거창 덕유산과 지리산을 맞닿아 있어 6.25 전쟁 당시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던 대표적인 곳이란 점에서 우 박사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우장춘 박사와 이 대표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 대표는 “당숙인 이종민옹께서 우장춘 박사의 수제자 였어요. 그래서 이종민 옹은 당시 인천 송도의 농장에 농장장으로 부임했고 그 분의 영향으로 저는 농업은 물론이려니와 채소, 화훼를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죠”

그랬다. 인연의 끈은 질기고 길어서 오늘날 그의 남양주 진건읍 배양2리 농장 곳곳은 우장춘 박사의 지혜와 숨결이 곳곳에서 배여 있었다.

현재 이 대표가 꾸리고 있는 농장의 면적은 6천 270㎡로 비닐하우스 14개 동에는 시클라멘과 베고니아, 온시디움, 고무나무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들을 양재동 화훼 경매시장에 공급해 거두는 연간 소득만 2억 원이 넘는다.

넉넉한 소득만큼이나 이 대표의 인상도 온화했다. 마치 근엄하게 웃는 안동 하훼탈의 모습이랄까. 그에겐 도무지 욕심이나 세상의 욕정은 없어 보였다.

지금은 자신의 분신인 아들 상민(37)씨에게 농장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털어내고 있었다. 아들 상민씨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자라나는 외래종 화훼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단다. 이들이 목마른지, 더운지, 건조한지, 슬픈지, 기쁜지 등등. 어떻게 아냐고? 바로 아버지인 이금수 대표의 가르침 때문이다.

이 대표는 식물과 항상 호흡한다. 호흡은 보고, 들으며 조용한 떨림과 울림 가운데 쉬지 않고 일어난다. 이런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아들 상민씨는 벌써 인터넷 홈페이지 남양주 팜시티넷에 아버지의 농장에서 자라는 화훼들을 판매하고 있다.

이 대표의 최대 스승은 당숙이지만 당숙을 가르친 선생은 우장춘 박사였다. 그는 한국 농업발전과 역사를 이끈 우 박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자신도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 말은 곧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나이 환갑이 넘으니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가고, 이미 정년 퇴임한 친구들은 낮에 산이나 다니고 주전부리나 하고 있어요. 그런데 농업은 정년이 없잖아요”

맞는 말이다. 이제 농촌은 그저 도시의 보급소, 생산 전진 기지가 아니다. 더 이상 도시에게 빼앗기기만 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곳이 아니라 미래 한국 경제를 이끌어 나갈 첨병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도 아쉬움이 있다. 현 정부 들어서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사실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까지 화훼는 언제나 사치로 인식 돼 왔다는 것이다.

“화훼분야가 농업으로 편입됐지만 아직까지 정부의 인식 수준은 서양에 비해 낮아요. 화훼도 당당히 소비 기호 산업으로서 소비자들 스스로 투자를 해서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많이 구입해야 해요”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람들은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화훼 시장에 요즘 저마다 뛰어들다 보니 중간 브로커 상들이 농간을 피우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죄다 헐값에 팔아야 일단 농장 운영비라도 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대표는 죽을 때 까지 화훼를 한다고 한다. 왜 편히 살 방법이 있고 충분히 돈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이 대표의 답변은 나로 하여금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우리의 뿌리는 농업이예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 곡식을 먹고 자라고 늙고 병들면 죽습니다. 이건희나 이명박부터 시골의 촌로에 이르기까지 결국 모두 똑같아 지는 걸요”

장마가 한창인 이때 그의 말을 들으니 땅의 의미와 인생, 인간의 욕망과 허황된 꿈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생명의 소중함 깨달은 농사꾼
기술개발로 고품질 식물 생산

- 하우스에서 자라나는 화훼 작목의 재배기술은.

▲베드관수법(pool & dive) 개발을 통해 병해충은 물론이고 생장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했다. 상하 이동이 가능하고 베드에 물을 채워 관수하는 새로운 저면관수법인데 균일한 고품질의 분화를 생산할 수 있어 유용하다. 또한 자동관수로 인해 인건비도 아낄 수 있다.

- 농장 경영의 원칙이 있다면.

▲작부 체계라고 하는데 이것이 잘 확립되어야 한다. 그 동안 재배한 품종을 다 출하하고 나면 어떤 작물을 또 심고 공급할까 이런 고민을 하면 이미 끝난 것이다. 농장에서는 출시 후 무엇을 심고 기를지를 미리부터 기획하고 종자를 확보해 계획적인 운영을 해야 생존 할 수 있다.

- 당숙이 아니라면 지금 본인이 어떻게 됐을 것이라 생각하나.

▲오늘날 화훼 분야의 명맥을 잇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벼농사나 기타 과실류 재배는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당시 당숙이 아니라면 현재 나의 삶은 아마 불확실성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자식에게 농장을 물려주더라도 계속 땅에 발을 붙이며 흙과 농촌,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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