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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방어기제’ 답안 제시 전근배 前 광주하남교육장

작년 8월 정년퇴직 하자마자 ‘성교육예방 지원단’ 발족
5개월동안 수원·안양 등 20여개 학교 교원·학부모 강의
“성교육 정도론 개선안돼… 학교현장부터 달라져야 돼요”

 

지난 17일 오전 수원시 장안구 경기도교육청 주변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11시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춰 그가 나타났다. 퇴직한지 5개월이 지났지만 42년 6개월 그 공직 기간의 엄격한 시간관리는 여전했다. “오랜만이예요. 근데 쑥스럽네요. 퇴직해서 그냥 맘 편히 봉사하는 건데…. 허허. 어디서부터 얘기할까요”

영하 15도의 혹한 추위에 급히 달려온 탓인지 그의 서린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10분여 그간의 안부와 근황, 최근 교육 이슈에 대해 가볍게 얘기를 나누며 몸을 녹인 후 인터뷰를 시작했다.

“선생님, 왜 ‘성교육예방’을 제2의 인생 타킷으로 잡았습니까” 다소 특이한 ‘봉사’를 택한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보통의 퇴직 원로 교육자와는 달리 ‘가지않는 길’을 택한 불가피한 이유라도 있는지 물었다.

순간, 그의 밝은 표정이 멎었다. 정말 누가봐도 언제봐도 인상 좋고 맘씨 좋은 그의 인상이 진지해졌다. 마치 아픈 과거의 사연을 고백이라도 하는 듯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말 문을 열었다.

“지난해 2월, 퇴직 5~6개월을 앞두고 전국에서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터졌어요. 안산 조두순, 부산 김길태, 서울 김수철 사건 등등. 전국이 떠들썩했죠. 근데 가해자 피해자 모두 우리 교사들이 가르친 제자예요. 가해자는 저와 선배들이, 피해자는 후배 교사들이 가르친 제자이죠. 잘못 가르친 우리 교사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같은 원로 교육자가 나서 교사 후배들을 A/S해야 한다고 결심했죠.”

A/S는 다름아닌 책임의식이다. 못난 선배 교사로서 후배 교사들한테 ‘성폭력 예방’이라도 시키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희망의 열쇠’를 가진 것이 아직도 ‘교단’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이럴 때 교실도 변하고, 가정도 변하고, 삶도 변화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즉시 기본 계획과 로드맵을 짰다. 6개월여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난해 8월,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성교육예방 지원단’을 발족했다. 구성 인원은 그와 정지풍 前 안양과천교육장, 조성준 前 수원교육장 등 3명. 그 시작은 미약하고 단촐했다. 9월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갔다.

“교육 대상은 교사와 학부모들이었죠. 우리 원로 3명이 도내 곳곳을 순회하며 강의했어요. 교육 내용은 상급학생이 하급학생을, 교사가 학생을, 교직원이 학생 또는 교직원을, 성인이 학생을 성폭력 성추행한 사례를 수집해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알려주는 거죠. 다급한 상황에서 과연 교육받은대로 대처할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교육의 힘은 무서운 거예요. 예방교육은 ‘잠재적 기억’을 행동으로 불러 일으켜 그 막다른 상황에서 슬기롭게 벗어나는 힘을 발휘하게 되죠.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서의 가상 훈련이고 ‘방어기제’를 습득하는 교육이죠.”

그래서 교육은 각 사안별 가장 유효한 대처 방안에 대해 수강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모색하는 시간도 갖는다. 다양하게 제시된 대처 방안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의 ‘성폭력예방’ 지침도 전달한다. 벌써 발족 5개월여 안양, 수원, 파주, 의정부, 동두천, 시흥 등 도내 6개 지역 20여개 학교 2천여명의 교원과 학부모들을 강의했다. 그 반응도 놀랍다. 특히 학부모들의 관심과 호응이 뜨겁다. 피부에 와닿는 ‘명강의’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학부모들이 몰랐던 각종 사례들을 정확히 알고 나서는 ‘너무 유익했다’고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박수를 보내요. 그간 피상적으로만 대했던 거죠. 하지만 강의를 들은 후 많은 것을 깨닫는 거죠. 절대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면서죠.”

그의 강의는 무료다.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멀리 동두천 의정부를 오가지만 무료 봉사다. ‘불러만 주면 달려가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성폭력 예방’에 대한 시급성을 일선 학교장들이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 무관심이다. 우선 순위에서 밀려 연수 프로그램에서 밀린 탓도 있지만 별 신경을 쓰지않는 분위기다.

“사고가 터진 후에나 깨달을까요. 이 교육은 정말 필요한 거예요. 현행 학교 보건소의 교육은 성교육에 중점하고 있을 뿐 ‘성폭력예방’과는 무관해요. 국내 대다수 관련 프로그램이 ‘성상담’ 혹은 ‘성폭력 사후의 처리 및 상담’에 치중하고 있어요. 이래서는 절대 개선되지 않아요. 학교 현장에서부터 달라져야 돼요. 지금이라도 경기도교육청이 나서 ‘성폭력 예방’에 앞장서야 돼요. 이 문제만큼은 그 출발이 학교에서부터 이뤄져야 돼요.”

그는 단호했다. 대대적으로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부 학부모들이 강의를 듣고나서 ‘전문 강사로 나서고 싶다’는 제의도 잇따른다. 그는 교직보다 ‘교육행정직으로 근무했을걸…’하는 아쉬움과 후회도 있다. 행정직 지원이 한계에 부딪히고, 과거 교직 인연으로만 ‘수강 요청’이 들어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시작한지 1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이런 생각의 원천을 어디서 갖고왔냐고 물었다. 화제를 그의 삶의 철학으로 조금 옮긴 것이다. 물론 잇따른 성폭행 사건이 계기가 됐다지만, 그 근저에는 그의 정체성과 맞물린 분명한 삶의 철학이 있을 터. 너무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는데도 그는 망설임 없이 또렷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퇴직 무렵,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의 영향이 컸어요. 루게릭이란 병을 갖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모리 교수가 생을 마감하며 삶의 의미를 되짚는 이야기인데 너무 감명 깊었어요. 모리 교수의 ‘살아 생전의 장례식’은 저의 삶의 인식 수준을 높여줬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지금을 중시하며 살아야겠다고 깨달었어요. 내가 가진 경험과 열정, 노하우를 ‘다쓰고 죽자’고 생각한 거죠.”

그의 이모작(二毛作) 인생의 첫 타킷이 된 배경이다. 모리 교수의 ‘삶의 시간표’가 그의 인생 2막의 틀을 완성시켰다. 앞으로 20년간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 바치기로 한 것이다. 평생 교육의 노하우를 우선 ‘성교육 예방’에 바치기로 했다. 현직 때 잘못했던 것에 대한 A/S 차원이기도 하다. ‘삶은 시간이 연속이고, 일과 사람의 만남의 연속’이라는 모리 교수의 삶의 지표를 모델로 삼았다.

“일단 ‘성교육 예방’이 자리잡을 때까지 혼신을 다할 거예요. 그 이후 후배 퇴직 교사들에게 바통을 넘길 거예요. 그 다음은 제가 젊은 시절에 개발한 ‘한글프로그램’으로 다문화가정을 돕고, 틈틈이 독학으로 배운 ‘섹스폰’을 갖고 전국을 순회하며 ‘길거리 독주회’로 음악을 선사하고 싶어요. 잘 될지 모르겠지만….”

인터뷰 내내 미국에서 노인을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시니어라는 말엔 풍부한 경륜이, 시티즌이라는 말에는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약력

- 1948년, 충남 아산 출생

- 검정고시로 온양고교, 온실근로장 학생, 인천교대

- 수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 전공

- 1968년 용인 장평초교 초임

- 1988년 안성 보개초 교감

- 1993년 광주하남교육청 장학사

- 2000년 수원 원일초 교장

- 2002년 경기도교육청 기획담당장 학관, 정책장학관, 정책과장

- 2005년 광주하남교육장

- 2010년 8월, 수원 신성초 교장 퇴직

- 교육부장관 표창 등 다수

- 내무부연수원, 법무연수원, 성결 대 강의

- 1968년 사랑의 종소리 창시자

- 1980년 한글 미해득자 지도 프로그 램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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