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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on이사람] 박영렬 변호사

30년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 시작

그의 검사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열정’의 산물이었다. 초년 검사 시절 한 마을 주민 모두가 억울하게 뺏길 뻔 했던 땅을 찾아주는 일부터 부장검사때는 간첩 누명을 쓴 수지김 사건 해결과 광주지검장에 부임한 후에는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이제는 변호사로서 법률적 지식이 부족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열정을 쏟아내고 싶다는 박 변호사. 그가 걸어온 길과 이제 그가 걸어가고 만들어 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l 이보람기자 lbr486@kgnews.co.kr
사진 l 이준성기자 oldpic316@kgnews.co.kr

 

 


박 영렬 변호사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지난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 1983년 서울지검 동부지청에서 사법부에 첫 발을 내딛으며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로 꼭 검사생활만 28년째이며 사법연수원의 기간까지 합치면 30년간의 사법부 생활을 한 셈이다.

지난 30년간 숱하게 많은 사건과 수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박 변호사는 그의 특유의 미소를 띄우며 지난 1983년 서울 강동구 하일동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주민들이 살던 한 마을에 매매계약서가 위조됐다며 지주의 후손들이 찾아와 마을 주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박 변호사는 당시 마을 전체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사에 돌입했고 결론적으로 그 후손들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마을 주민들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을 다시 찾아줬다.

또 서울지검 외사부장으로 재직시 공소시효가 임박해 영구미제로 남을 뻔 했던 수지 김 사건을 해결했던 일 역시 당시 주변의 압박과 외압에도 불구, 한 여성에게 15년간 ‘간첩’이라는 낙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

두터운 덕망의 비결은 화합과 소통

사건 해결 뿐 아니라 박 변호사는 지역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지난 2008년 광주지검 검사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에는 광주시가 안고 있는 ‘교통사고 1위도시’라는 불명예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내 모든 단체의 협력을 이끌어 내 지속적인 교통안전 캠패인을 벌였고 그 결과 1년만에 교통사고를 30% 가량 줄일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그의 검사 생활은 은근과 끈기, 그리고 열정으로 무장해왔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는 편안한 조력자의 생활을 추구했다.

그는 다소 딱딱하고 자기 중심적인 검찰 조직의 유연성과 편안함을 위해 늘 소통을 강조했다.

특히 모든 직원들이 ‘퇴근할 때 출근하고 싶은 일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이에 수원지검 검사장으로 있을 당시 다양한 동호회 활동과 단합대회 등으로 직원들의 화합과 소통을 중시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검찰을 떠나오며 검찰 내부 전산망에 올린 글에는 후배 검사들 대부분이 댓글을 달아 박 변호사의 떠남에 대해 아쉬움과 박 변호사를 추억하는 글을 남겼고 한 후배는 그 댓글을 모두 담아 선물을 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후배 검사들의 댓글로 가득찬 이 선물을 바라보면 지난 30년간 걸어온 검찰생활 중에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값지고 소중하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법률사무소 개소

이렇게 검찰 생활을 정리한 그는 지난 9월 2일 서울 서초동에 박영렬 법률사무소를 개소했다.

사실 주변에는 대형 로펌이나 수원 지역 쪽에서 활동을 하지 않겠느냐는 예상과 달리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내가 수원지역 쪽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게 되면 혹시라도 후배 검사들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서울로 왔다”고 이유를 전했다.

이처럼 검찰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박 변호사는 현재 검찰을 둘러싼 각종 이슈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특히 스폰서 검사 등의 사건에 대해 검찰 간부 출신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박 변호사는 “우리 조직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미래검찰을 창조할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惠焚蘭悲 松茂栢悅(혜분난비 송무백열)의 덕목이 필요한 검찰

박 변호사는 검사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으로 혜초가 불에 탈 때 함께 슬퍼해주는 난초의 따뜻한 마음, 소나무가 번성할 때 더불어 기뻐해주는 잣나무의 열린 자세를 가질 것을 당부했다.

이는 정의의 잣대로 시비곡직을 가려야 하는 검찰이 자칫 소홀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라고 전했다.

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난 후 좋은 성과를 얻게 된다면 자신이 한 일은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 아홉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운이라고 생각한다는 박 변호사는 늘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대해야 한다고 전했다.

억울함 풀어줄 수 있는 삶 살겠다

마지막으로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갈 계획이냐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이제 변호사로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그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겠다”며 짧고, 그리고 당당히 말하던 박 변호사.

검사 생활 30년동안 ‘열정의 산물’을 만들어 냈다면 이제는 변호사로서 ‘희망의 산물’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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