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장인을 찾아서]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 소목장 김순기씨

화성행궁 창호 4500짝 그의 손길로 빚어지다
나무와 50년… 경복궁, 서울역 복원에 온힘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 ‘김순기 창호공방’ 운영

 

글/사진|안병현 편집장 abh@kgnews.co.kr

수원 화성(華城)의 백미는 7개의 수문 사이로 물이 흐르는 화홍문이다. 뒷쪽에는 연못 위로 조선시대 정원의 운치를 자랑하는 방화수류정이 나그네 발길을 붙잡는다. 팔달산 기슭에서 연무대를 향해 출발하는 화성열차 중간 기착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로 붐빈다. 국내 사진 동호회원들이 좋은 사진을 담기 위해 포인트로 정해 놓은 곳도 이곳이다.

화홍문에서 5분여 남짓 발길을 옮기면 ‘김순기 창호공방’(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48)에 다다른다. 퉁명하고 울퉁불퉁한 나무 덩어리가 사람 손에 의해 예술품으로 재탄생하는 곳이다. 바로 옆에는 ‘김순기 창호전시관’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실내에는 소담하고 화려한 창호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 소목장 김순기씨(69)의 혼이 깃든 곳이다. 50년 이상 창호(窓戶)만드는 일만 해온 그는 이곳에서 나무와 함께 보내고 있다. 나이가 들 수록 일이 더 많아 진다는 김씨는 기자가 찾아간 시간에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창호 회장 자택 문살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안내를 받아 창호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사랑채에 잠시 들른 느낌이었다. 그는 서류더미를 뒤적이더니 50년 가까이 된 것이라며 수원세무서가 발행한 영업감찰(현재의 사업자등록증)을 내보였다. 1967년 2월 10일 이라고 쓰여진 영업감찰에는 먹으로 김순기 라는 이름과 함께 ‘중앙목공소’라는 사업장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이 영업감찰은 사업자등록증으로 바꿔 주소지만 변경했을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김씨는 또 손바닥 만한 수첩 5개를 꺼내 놓았다. 수첩을 들추자 작업명령서와 같은 다소 생소한 내용의 글귀와 숫자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적혀 있다. 50년 목공작업의 땀과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 그는 이 영업감찰과 수첩 5개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긴다. 그의 인생과 함께 해온 가족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집을 짓는 근간은 목공작업이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진행돼 나무 창살도 기계에서 찍어져 나오는 시대가 됐다. 이는 곧 목공작업의 사양화로 이어져 왔지만 김씨 같은 목장들이 그나마 나무의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목수는 목장(木匠) 목군(木軍)이라고 불렀다. 목수중에서도 대목은 집의 구조체에 해당하는 기둥 ㆍ보 ㆍ도리 ㆍ공포를 짜고 추녀내기 ㆍ서까래걸기 등 지붕의 모양을 결정하는 일을 한다. 소목은 창 ㆍ창문살 ㆍ반자 ㆍ난간 ㆍ계단 ㆍ마루 등을 짜는 일을 맡아 했다.

조선 초기에는 궁궐을 짓는 일을 맡은 목수에게는 벼슬을 주었는데, 서울남대문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세종 때의 남대문 재건공사에는 정 5품의 대목, 정 7품의 우변목수, 종 7품의 좌변목수 등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최근들어 순수한 목조건축물이 거의 지어지지 않게 됨에 따라 목수의 직능이 쇠퇴됨은 물론, 기술의 전수도 어려워지고 있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나무를 벌목하고 다듬는 데 쓰는 자귀 ㆍ도끼, 나무를 자르는 톱 종류인 인거 ㆍ단거, 나무의 표면과 모서리를 깎거나 밀어내는 대패 ㆍ줄미리 ㆍ탕, 나무에 구멍을 내는 송곳 ?끌 등이다.

경기도무형문화재 14호 소목장 기능 보유자인 김씨는 1942년 안성에서 태어났다. 시인 조병화 선생과 같은 장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4살때 혈혈단신 수원으로 올라와 장안동에서 당시 인간문화재 이규선 선생이 운영하던 목공소에 입소해 나무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가구도 만들고 문 만드는 법도 배웠다. 기술이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주문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면서 때아닌 호황을 맞게 됐다.

그의 나무인생 10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작업장을 갖게 된 것. 그때가 1965년. 장안동에 붙어있던 북수동 212번지에 작업장을 갖추고 ‘중앙목공소’라는 간판을 올렸다.

목수생활이 그리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수원 화령전 보수공사를 하다가 오른 손가락이 두 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방황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인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일에 온 힘을 쏟았다. 화성 서장대 2층 창호작업과 설악산 신흥사 류각, 세마대 서마사 요사채 착수, 강원도 고성군 왕곡 민속마을 복원, 경복궁 복원사업 천추정 만춘정 회장 동궁 칠궁 등 복원, 충남 병천 조병옥 박사 창호 작업 등 그의 작업은 국보급으로 성장해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꿈은 1995년에 이뤘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것이다. 강원도 월정사 요사채, 여주 명성황후 갱가 복원 창호제작, 수원 화성행궁 복원사업 총 578칸 창호 4천500짝 제작, 남한산성 상궐 남행각 재석당 복원 창호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됐다.

창살에는 배미리와 투미리가 있는데 배미리는 일반 백성들의 집에 사용하는 창살로 단순한 직사각형의 막대기로 돼 있고 가로살과 세로살을 만든 후 두 살이 만나는 부분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춘다. 투미리는 사찰과 사대부가에서 쓰는 창살로 가로살과 세로살의 앞뒤 두께가 달라 제작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보기에 좋고 살들이 단단하게 끼이므로 견디는 힘이 강하다. 김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고급문 일수록 창살수가 많은데 홈 하나에 0.1mm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아 제작에 공이 많이 들어간다. 최고급 문짝은 꽃살이다. 사찰에서만 사용이 허용된 이 창살은 멀리서 보면 사선의 격자무늬 같지만 자세히 보면 벌집처럼 육각무늬이다.
 

 

 


최고의 자재는 춘향목으로 수입과 벌목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으나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8년여만에 캐나다산 홍송을 찾아낸 김씨는 주택 실내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한옥으로 지을 수 있는 설계와 구조를 보급할 계획이다.

지난해 10월 수원시는 팔달구 남창동 팔달산 옛 강감찬 장군 동상 인근에 12억원을 들여 사당 4.5칸과 삼문 8칸의 성신사를 중건해 위패봉안식을 가졌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소목장 김씨가 제작한 위패에 서예가 근당 양택동씨 쓴 ‘華城城神神位’를 만날 수 있다.

지난 1월 김씨는 캐나다 밴쿠버 뮤지엄에서 열린 한ㆍ캐나다 공예특별전에 출품한 ‘솟을 꽃살문’이 현지 언론과 교민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내년부터 시작되는 서울역 복원에 온 힘을 쏟을 예정이다.

김씨는 남들로부터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전통기술을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발전과 새로운 제품의 개발도 장인의 의무라 여기며 오늘도 묵묵히 외길을 걸어가고 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