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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터] 시인 이발사 은봉재 삶터 회장

시인 이발사의 머리 사랑, 제자 사랑
어머니의 그리움에서 빚어지는 언어의 연금술사

 

글ㅣ김동섭부장 kds610721@kgnews.co.kr 사진ㅣ최영석기자 choi718@kgnews.co.kr

‘시 인 이발사’ 은봉재(殷鳳載) 회장. 1944년생, 우리 나이로 예순 여덟. 희귀 성씨 인데다 산신령 인상의 조순 서울시장과 너무 닮아 기억이 오래간다. 인생 역시 그렇다. 평생을 ‘이용업’이란 직업으로 살아왔는데도 그의 명성은 자자하다. 경기 도내는 물론 이 업계에서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 이유는 뭘까. 탁월한 이발 기술로 수천 명의 이용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또 그만의 이발 철학을 갖고 ‘소통하는 이발사’로서 그 소임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詩人)이기도 하다. 평생 글을 쓰면서 내면의 영혼을 빛내왔다. 어머님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모티브다. 성장기의 슬픔과 아픔을 시로 노래하며 인생을 관조해왔다.



‘남성 컷 전문 3천원’. 그의 사업장 입간판부터 눈길을 끈다. 지난 11일 오후3시 팔달구 매산로 2가 77-4번지, 도청5거리~수원역광장 중간쯤, 42번 국도를 경계로 우리은행 건너편 5층 보은빌딩 지하의 허름한 ‘경기이미용학원’. 100㎡ 남짓(30여평) 실내 공간을 양분해 좌측은 실습실, 우측은 이발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격증을 취득한 이미용 예비 창업자들이 일정 기간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원’인 셈이다. 이날 사업장에는 4명의 실습생이 남성 고객들을 상대로 ‘커트’를 했다. 그는 이들에게 기본기 훈련과 이미용 도구에 淪?활용법을 교육하는 ‘가위손’이다. “보통 10명 안팎의 실습생들이 있는데 오늘은 필기시험이 코앞에 닥쳐 4명뿐이예요. 이곳에서 최소 3~6개월은 실습해야 세련된 기술을 가질 수 있어요. 500명 정도 고객들의 ‘커트’를 해봐야 기본기를 익히죠.” 그의 훈련법은 정평이 나 있다. 탁월한 그의 ‘이발 기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인성교육이 훌륭해서다. 실습생 이병태(51·수원) 씨의 얘기다. “이곳에서 배워 나가면 A급이죠. 은 회장님님한테 사사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에요.” 이 씨는 중앙대 미대 서양화를 전공한 인텔리다. 미술학원 15년을 운영하다 과감히 길을 바꿨다. 대형 학원 탓에 영세 미술학원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지난 해 8월 자격증을 따자마자 이곳에 와 5개월여 실습 중이다. 은 회장의 40여년 노하우를 전수받고 내년 초 창업할 생각이다. 왜 ‘회장’이란 직함이 붙었을까. 그의 사업장 사방의 벽면에 빼곡히 걸린 4,50개의 액자가 웅변한다. 한국직능단체총연회 신지식인 선정(2002년), 제16대 이회창후보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경기도선거위 직능위원 자문위원(2002년), 한나라당경기도당 ‘경기도를 빛낸 선생님’(2004년), 이명박 대酉캤?한나라당경기도당 선거대책위선대위원장 특별보좌역(2007년), 직업능력개발 훈련교사 학생장(1998년), 수원기능학원장, 경기이미용협회장, 빈여백 동인…. 충실하고 정직한 삶의 흔적이다.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자.

그는 화성시 태안면 능리에서 태어났다. 병점초교를 졸업하고 열세살 때 수원 탑동으로 이사 왔다. 정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혹독한 가난을 맛본 사람은 드물다고 회고한다. “이젠 아련한 추억이지만 그 시절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어머니는 제가 열 살 때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으니까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채 열 살이 안됐을 때 하루 한끼 풀죽으로 때웠다. 어머니는 냉수로 배를 채우시다 돌아가셨다. 학업의 길이야 오죽했으랴. 그는 광명 야간중학교(당시 매산초교 뒤편, 지금의 경기도청 정문에 위치)에 진학했다. 낮에는 농촌진흥청에서 잡부로 일했다. 철없는 열네 살의 나이 때다. “논밭의 작물을 재배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어요. 하루종일 일하다가 밤에 학교에 가면 파김치가 됐죠. 그 시절 그래도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문학도의 꿈을 키운 것도 이때. 이후 어렵게 어렵게 삼일공고에 진학했지만 학비 때문에 1학년 때 중퇴하고 만다. 본격적인 이용업이란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스물 한 살 때.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 금새 자격증을 따고 서둔동의 한 이발소에서 1년여간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입대했다. 36개월 만기복무 후 제대한 그는 곧바로 중매 결혼해 양돈업과 건축업에 손댔다. 하지만 유류파동과 모질지 못한 성격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다시 운명같은 ‘이용업’에 나선 것은 서른 두 살 때, “천직이었나봐요. 11년만에 다시 가위를 들었죠. 수원역에서 종업원으로 3년간 일하고 독립해 매산로에서 10년간 영업했어요. 마흔 한 살 때 수원시이용조합장을 맡았죠.” 성실성과 뛰어난 리더십 때문이다. 이후 쉰 여섯에 이미용경기도지회장과 중앙부회장직을 맡아 무려 10년간 이끌었으며, 수원직업전문학교 교장(1992~2002년) 등 이 업계의 명예직 최고위 직책을 두루 거쳤다. 그의 이같은 저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문학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습작해온 시(詩)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60여년을 써왔다.
 

 

 


지난해 7월 ‘월간 시사문단’에 등단했다. ‘5월의 노래’, ‘비오는 밤’, ‘세월은 늘 그렇게’란 세 편의 시로 칠?평생의 꿈을 이뤘다. 그가 써온 3천여 편의 시 가운데 고작 세 편만 선보였다. ‘세월은 늘 그렇게’란 시를 보자. ‘세월은 늘 그렇게 / 낮밤을 뒤엎으며 비 뿌려 꽃 피고는 바람 부니 일상이네 / 때로는 천둥 벼락같은 애환 소리의 세월이 다가도 / 눈부신 태양같은 세월이기도 하여 / 세월은 시소를 타는 것 같기도 하고 / 저울의 무게를 다는 것 같기도 한데 / 이제는 바람 불 때마다 한쪽으로 흔들리는 내 마음을 / 세월은 늘 그렇게 한 가운데 있게 / 세월에 순종하며 중심 세우네’ 그의 인생을 압축한, 삶을 달관한듯한 진실된 시다. 그 어려운 시절, 시는 그의 삶이었다. ‘이용업’이란 직업 때문에 가끔 상처 입었을 때 그를 위로한 건 시(詩)였다. 그에게 시는 정신적 양식이었다. 그가 얼마만큼 문학과 배움의 한이 맺혔는지 보여주는 옛 기억의 한 편린. “고교 1년 중퇴 후 서울 남산에서 노숙을 했어요. 학업의 길을 잇고자 흰 무명천 두루마기에 매일 매일 손가락 열마디를 베어서 183자(字)혈서를 썼어요…. 공부를 시켜주면 평생 잊지않고 신세를 갚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는 이 혈서를 당시 남산 근처의 ‘성베드로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께 바쳤다. 공부를 할 수 있?‘추천장’이라도 써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않았다. 지금도 두고두고 그때의 서운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 맺혀진 젊은 날의 상처다. 하지만 그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생업에 목숨을 바쳐 일했다.



“이젠 이미용업이 천대받지 않는 세상이 됐어요. 그땐 열등감이 많았지만 세상이 달라졌어요.” 이어 그는 ‘이발사’란 역사적 고찰로써 ‘고귀한 직업’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사는 ‘안종호’란 사람이예요. 일제 강점기 때 단발(斷髮)령의 포고로 ‘체두관(剃頭官)’이란 직책이 생겼죠. 고종이 먼저 머리를 자르고 왕과 가족들을 위해 궁 안에 이발소를 설치했어요. 이때 완주군수였던 ‘안종호’란 사람이 세자와 가족을 가르치는 대강원의 정상품독(正三品讀) 당상관으로 특채돼 고종황제의 이발사로 발탁돼 지엄하신 황제와 왕자의 머리를 다듬었죠. ‘안종호’ 선생은 후에 방역회(防疫會)를 조직해 세종로와 태평로에서 최초의 이용원을 경영했어요.” 그는 ‘이발사’란 직업의 유래를 설명하며 절대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 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요. IMF 이후 기능직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어요.” 이 사업장의 고객들 대다수는 서민들과 그를 아는 단골들이다. ‘3천원’이란 저렴한 이발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섬세한 예술적 손기술’에 매료돼서다. 그는 고객의 머리를 다듬으며 ‘대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낸다. 주된 대화는 역사. 모든 정신과 물질의 폐해가 역사관이 투철하지 못해서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안목에 고객들이 놀라곤 한다. “수원역사 부근이다보니까 조선족들이 자주 찾아요. 이들은 같은 한국인인데도 이상하게 親중국이예요. 이때마다 한국인이 긍지를 갖게끔 얘기를 뮌?하죠.” 그는 지난 2003년 96세의 나이로 작고하신 아버님을 평생 모신 효자다. 이웃의 초상마다 ‘호상지기’로 불려다닐 정도로 상가(喪家)의 예법에 정통하다. 회닫이를 하는 하관식 때의 ‘사별가’ 183구(句)를 손수 지어 15분씩 3회, 45분간 북을 치면서 사별가를 불러 고인의 명복을 빌어준다. 그의 또 하나의 봉사정신이다. 그는 올해 시집을 낼 계획이다. 평생 써놓은 3천여 편의 시 가운데 모정과 인생을 소재로 한 시만을 묶어서다. “시집을 내게 되면 제 인생의 제2출발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젠 시작(詩作) 방향도 인간적 내면?맞출 거예요. 나만의 시 세계를 추구하고 싶어요.” 그는 근래 ‘한중록’을 정독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왕세자비, 혜경궁 홍씨의 실록을 통해 영정조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읽기 위해서다. 그것이 ‘수원화성’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의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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