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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초대석] 김진기 세지화학 대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모델 세지화학의 경쟁력
유한양행 40년에 가까이 유한락스 용기 공급
中企중앙회 경기회장 맡으며 ‘고군분투’

글ㅣ홍성민기자 hsm@kgnews.co.kr 사진ㅣ최우창기자 simer@kgnews.co.kr

 

 

최 근 정부가 추진하는 ‘대·중소기업 상생성장’이 경영계의 화두가 되고 있다. 부당 단가인하 등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관행을 뿌리 뽑아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경쟁력을 키워나가자는 것이 가장 큰 취지다. 초과이익 공유제,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 등 여러 방안이 논의 되고 있지만 추진 자체가 자칫 대·중소기업 간 오해와 불신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 오직 하나의 대기업과 외길을 걸어온 중소기업이 있어 주목된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소재한 세지화학(대표 김진기·67·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역 회장, 인천·경기플라스틱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대표적 제약·화학회사인 유한양행과 40년 가까이 동반 성장한 중소기업이다. 세지화학의 설립자이자 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역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진기(67) 대표를 만나 그의 삶과 경영철학을 들어봤다.

유한락스와 함께한 40년

국내 최초의 살균 소독제인 유한락스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1975년부터 유한양행이 생산하기 시작한 유한락스는 30년을 훌쩍 넘은 이제 각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가정뿐만 아니라 식당, 급식소, 공중목욕탕, 수영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유한락스 제품의 사용이 당연시 된 장수 제품이다. 바로 이 유한락스가 세지화학과 유한양행을 오랫동안 이어주고 있는 질기고 단단한 끈이다. 김진기 대표가 이끌고 있는 세지화학과 유한양행의 인연의 시작은 1970년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대 중반 출시된 유한락스는 당시 생활용품 시장에선 낯선 상품이었지만 깔끔하고 확실한 위생력 덕분에 가정에 꼭 필요한 살균 소독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출시 1년만에 갑작스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유한락스 제품에서 발생한 가스가 팽창하면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용기가 부풀어 올라 소비자들의 불만이 쏟아진 것이다. 유한양행은 이를 해소하고자 여러 용기 제작업체에 해결책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당시의 낙후된 플라스틱 제조 기술로써는 개선이 쉽지 않은 난제였다.

그때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세지화학의 김진기 대표였다.

“큰 기회였죠. 문제는 가스를 소멸시키는 것인데 당시 플라스틱 용기의 기포를 분산처리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서 첫 납품을 시작할 수 있었죠”라며 김 대표는 당시를 회상했다. 김 대표의 세지화학이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플라스틱 용기 문제를 신기술 개발로 개선하면서 유한락스 용기를 단독으로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설립초기 500만원도 채 되지 않았던 세지화학의 매출액은 유한양행에 납품을 개시하면서 급성장했다. 특히 1980년 중반 이후 유한락스가 소비자들의 큰 인기를 얻으면서 세지화학 역시 매출 신장의 급물살을 탔다. 당시 세지화학의 연매출은 30~50억원 규모에 달했다고.

세지화학에게도 내리막은 있었다.

유한양행과 거래한 지 10여년이 가까이 지난 1985년. 저렴한 공급단가를 앞세운 경쟁업체가 출연하면서 세지화학의 납품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공장 가동률이 절반으로 떨어지면서 감원 등 전체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큰 위기였다. 하지만 경쟁업체는 공급을 시작하자 이내 품질 불량문제가 빚어지면서 퇴출되게 된다.

유한양행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세지화학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가 더욱 커지면서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던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됐다. 비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 셈이다.

김진기 대표는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찾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쌓아온 신용이 더해지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김 대표는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 박사는 ‘기업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발전없이는 회사의 발전도 없다’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다”며 “하청업체까지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했던 것이 오랫동안 함께 상생할 수 있었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두번의 실패…그리고 만난 은인

김진기 대표는 세지화학을 설립하기 전 두 번의 쓰라린 좌절을 맞보게 된다.

젊은 시절 김 대표는 가난을 벗어내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고 전쟁터에서 벌어온 18만원이 그의 첫 사업의 종잣돈이었다. 당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병사 1명의 월급은 약 30달러로 한화로는 약 1만원 가량이었다. 김 대표의 첫 사업은 비닐하우스용 PE필름을 제조하는 사업이었다. 부산에서 어린시절 고학하며 공장에서 익혔던 플라스틱 제조기술이 사업의 또 하나의 밑천이 됐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단행한 ‘8.3조치’(기업사채 동결)로 그의 첫 사업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시 신용장을 담보로 한 대출이 성행했는데 김 대표 역시 이를 이용했다가 ‘사채냐’, ‘아니냐’를 두고 법정공방에 휘말리게 됐다. 이 과정 중 수입한 폴리에틸렌 원료가 하역장에서 그대로 발이 묶였다.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사채가 아니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반년 동안 지연된 통관절차로 불어난 이자와 생산 중단사태로 공장은 묻을 닫게 됐다.

이후 김 대표는 재생수지 생산을 또다시 시작했지만 첫 번째 사업에서 이미 큰 손해를 입은 터라 재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눈 앞이 캄캄했죠. 하지만 당시 저에게는 돌봐 드려 할 부모님과 저만 의지하는 형제들이 있었어요. 때문에 이를 더 꽉 깨물고 오기로 버텼습니다”라며 김 대표는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막막하기만 했던 그에게 빛이 되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사업을 하다 친분이 있었던 한 지인이 김 대표의 딱한 사정을 듣고 500만원 짜리 약속어음을 선뜻 김 대표에게 건네 준 것이다. 1970년 대 말 500만원은 웬만한 집 한채 값이었다.

김진기 대표는 “그 큰 돈을 저의 신용 하나만 보고 빌려 준 거에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이기억 국제케미칼 대표가 없었다면 재기는 물론 지금의 세지화학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고인에 대한 고마움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김진기 대표는

△ 1945년 9월 경상북도 봉화군 출생 △ 경북봉화초·중학교 졸업 △ 부산광성공업고등학교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 미국 링컨대학교 명예 경영학박사 취득 △ 현)㈜세지·세지화학 대표 △ 현)한국플라스틱공업협회 회장

△ 현)인천·경기플라스틱공업협동조합 △ 현)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역 회장 △ 현)한나라당 영등포구 을지구당 고문

수상경력 △ 경찰청장, 국세청장 표창 △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표창 △ 법무부장관, 행정자치부장관 표창 △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표창 △ 김영삼 대통령 표창 △ 김대중 대통령 포창 △ 국민훈장 석류장, 모란장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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